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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6. 00:00

마산번창기(1908) - 16

제7장 교통

 

□ 우편전신, 전화

이들 사무는 모두 마산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일본인, 청국인, 한국인은 물론 구미인의 서신, 전보도 다 다루고 있다. 집화와 배달은 매일 수차례 행해지며 아주 편리하다.

특히 마산포에도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를 소장으로 하는 우편소가 있어 서신과 전보를 취급하고 있다. 부근 각지의 서신과 전보를 처리하고 마산국과 연락을 취하는 곳으로 진해우편소, 통영우편소, 진주우편국과 청도 연선(沿線)의 각 역(驛)이 있어 공중전보(公衆電報)를 취급하고 있다.

 

□ 철도

마산철도는 원래 일본 육군의 군사용으로 1904년 8월, 러일전쟁 교정 중에 경부선의 삼랑진에서 분기(分岐)시켜 속성 공사로 부설되어 다음 해 6월에 개통했다. 평화가 돌아와 다음 해 1905년 10월부터 일반 승객의 편승(便乘)이 허가되었다.

 

<오른쪽 단층 건물이 마산역(현, 마산중부경찰서 건너편)>

 

당시 삼랑진과 마산 사이에는 진영과 창원이란 두 개의 역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06년 7월 13일 통감부 철도 관리국 소관으로 이전되었고 덕산, 유림정(楡林亭, 해방 후 원래의 지역 이름인 한림정으로 바뀌었다.), 낙동강의 3개 역이 추가 설치되어 선로의 개수에 착수하였다.

덕산과 한림정에는 별도의 역사를 두지 않고 수시로 오르내리게 했다. 1908년 4월 1일부터 영업선(營業線)이 되고 낙동강 대교가 그해 6월에 개통했다.

그 발착시간(發着時間) 운임 및 거리(마일)는 다음 표와 같다.

 

북행 역명 이수
(거리)
승차요금 열차번호 및 발착시간
2등 3등 40 오전 42 오전 44 오후 46 오후
마산       6:00 9:32 12:15 3:45
창원 5.5 32전 18전 6:19 9:52 12:35 4:05
덕산              
진영 14.9 79전 45전 6:51 10:25 1:09 4:39
유림정              
낙동강 23.5 1원26전 72전 7:23 10:59 1:43 5:13
삼랑진 25.0 1원32전 75전 7:28 11:04 1:48 5:18

 

남행 역명 이수
(거리)
승차요금 열차번호 및 발착시간
2등 3등 41 오전 43 오전 45 오후 47 오후
삼랑진       8:30 12:20 3:50 6:10
낙동강 1.6 11전 6전 8:42 12:32 4:02 6:22
유림정              
진영 10.1 58전 35전 9:16 1:07 4:37 6:56
덕산              
창원 19.5 1원5전 60전 9:50 1:40 5:10 7:29
마산 25.0 1원32전 75전 10:07 1:57 5:27 7:47

 

◎ 북행 40열차는 대공행(大功行) 15열차 및 부산행 급행 희호(熙號) 열차에 접속됨

◎ 북행 42열차는 경성 부산 급행 1열차 및 부산행 10열차에 접속됨

◎ 북행 44열차는 북행 17열차 및 남행 12열차에 접속됨

◎ 북행 46열차는 북행 융호(隆號) 열차 및 남행급행 2열차에 접속됨

◎ 유명 도시까지의 3등 운임은 다음과 같다.

부산 1원 65전

경성 5원 75전

신의주 9원 2전

시모노세키(下關) 5월 80전

오사카 8원 49전

도쿄 11원 26전

 

□ 해운

정기출입 기선은 오사카 상선회사의 배이며 승객, 화물의 취급 사무소는 혼마치(本町, 현 월남동) 4정목에 있다. 자유항로 임시선박의 출입도 있으며 이 회사 선박이 아닌 배도 때때로 취항하여 승객의 츨입이나 화물의 하역이 이루어진다.

부산에서는 요나고마루(米子丸), 산고마루(三五丸), 미나모토마루(源丸), 와시(鷲, 취) 호 등의 기선이 정기적으로 입항하여 통영, 삼천포 길을 왕복한다.

범선(帆船)의 출입은 극히 빈번하고 일본의 아키타(秋田), 아마가타(山形), 시마네(島根), 돗토리(鳥取), 야마구치(山口), 에히메(愛媛), 나가사키(長崎) 등 여러 현에서 목재, 땔감, 대나무류, 기와 등을 싣고 와서 세관 앞 부두는 항상 붐비고 있다. 또한 신해방비대의 포설정(布設艇)이나 모정(母艇)이 날마다 왕복하여 그곳과의 교통은 끊기는 때가 없다.

특히 토요일, 일요일의 기선은 군항의 수원(水源)인 마산 지방을 경유하기 때문에 편승자도 지극히 많다. 전투함, 운양함, 구축함 등도 갑자기 나타날 때도 있다. 사세보(佐世保) 수뢰단(水雷團), 다케시키(竹數) 요항부(要港部)의 구축함 혹은 수뢰정대(水雷艇隊)도 매달 몇 차례씩 와서 정박하면서 탐해등(探海燈)을 켜니 때아니게 마산의 암흑계를 밝히기도 한다.

기타 외국 군함이나 육해군의 용달선(用達船)이 입항하여 마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더욱 빛나게 함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마산에서 각 지역까지의 기선 운임은 다음과 같다.(단3등)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6원

부산 1원

목포 3원

군산, 인천 4원 <<<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여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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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5

제5장 신도 및 종교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시설도 없지만 멀리 고향을 떠나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숭배하여 앞날의 안전을 기원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건너와 오늘날 평온하게 살 수 있음은 신명(神明)의 가호(加護) 덕분이라 감사하지 않는 자 또한 없으리라. 날마다 신에게 감사하고 우국지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간접적으로라기보다 직접적으로 참배를 통해서 그 기원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무사도(武士道)의 장려에 도움이 되고 일본 정신을 양성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시 제일의 경승지(景勝地) 속칭 호시오카(星岡)는 당국자들 사이에 이미 공원지가 될 것으로 예정되어 맨 먼저 이세신궁의 그 혼을 나누어 받는다는 기획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하루 빨리 실현되었으면 한다. 신생아의 참배가 이루어지고 신덕(神德)을 느끼고 맹세를 올리며 나아가 대일본제국 국민임에 위안을 주게 되는 것은 거류민 전반이 강하게 바라는 바이다.

불교로는 본파본원사(本派本願寺), 정토종(淨土宗), 진언종진의파(眞言宗眞義派)의 세 교장(敎場)이 있다.

 

 

□ 본파본원사

포교장(布敎場)은 신시 하마마치(濱町 빈정, 현 창포동) 2정목 1번호(혼마치 4정목을 동쪽으로 들어간 모퉁이)에 있으며 개항 당시 러시아의 미센코(개항 이후 마산포에서 상업활동을 한 러시아인)란 사람의 소유 가옥을 빌려 쓰면서 히다카 타츠케이(日高達契) 스님이 열심히 포교에 종사하고 있다.

불교 여성회는 열심히 포교하는 중에 생겨나 제법 그 기세가 뚜렷하다. 스님의 세력 범위는 오직 마산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통영, 창원, 진영, 낙동강까지도 미치고 있다.

스님은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며 1904년 러일 전쟁 때 한국에 건너오게 되어 먼저 진해만방비대에서 설법하여 병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래 매월 한 번씩 첫째 일요일에 거제 송진까지 가서 설교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매월 15일에는 진영에 가서 무라이(村井) 농장의 농부들을 모아서 설교를 듣게 하고 있다. 스님은 활달한 성격으로 세상일에도 밝고 교제장(交際場)에서도 많이 환영을 받고 있다.

 

□ 정토종 포교장

신월동에 있으며 미스미다 지몬(三隅田持門) 씨가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사원이다.

그곳은 마침 화장터에 통하는 길에서 있어서 종파를 불문하여 화장자의 관을 이 절에 안치하고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은 여기서 고별하는 것이 예사다.

지몬 스님도 야마구치현 출신이며 다소 학식이 있고 세상일을 잘 알며 일본인 학교를 마산에 처음 세운 원조이기도 하다. 또한 세속사, 세상의 단맛 쓴맛 다 잘 아는 인물이라 하겠다. 마산 염불 강좌를 스님이 행한다.

 

□ 진언종 포교장

마산포 공신당산(公神堂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 곧 홍법대사당(弘法大師堂)이며 마산포 유지자(有志者)의 정신 수양을 위한 도량이다.

1908년 마산포의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송원조장)를 중심으로 그 외 유지들이 포교사 미츠미야 류코오(三宮隆晃, 삼궁융황) 스님을 위해 건축한 것이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숲이 우거진 데에 있어서 전형적인 사원풍의 절로서 마산포의 자랑에 들어간다. 스님은 니이카타(新瀉, 신사) 현 출신이며 대학림(大學林)을 나와서 그 유명한 도쿄 메지로(目白)의 절에서 샤쿠운쇼(釋雲照, 석운조, 1827~190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 진언종의 승려) 율사의 제자가 된 스님이다. 지금도 깊은 인연에 있어 만사 그 율사의 지휘를 받고 있다.

왕년에 서생이었기 때문인지 먹고 마시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가요, 음곡(音曲) 등에 능하다 한다. 가요와 시는 지금도 한다 하니 그 품행이 단정한지는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본 항(港)의 불교회의 상황은 이상과 같으나 한국인에 대한 도화기관(道化機關)을 갖춘 곳은 아직은 없다.

일상에서의 근행(勤行)은 우선 의식을 응용해서 일본 불교의 진상을 발양(發揚)하기 위해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생사를 깊이 사고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 함을 각성하고 헛되이 장례에 부조가 많음을 바라는 것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위안을 주는 것을 바라며 있다가도 없어질 재물이 많아지기를 원하기보다 고생이 낙이라는 개달음을 주는 것을 원하고 방편적(方便的)인 설교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보다는 도리어 선남선녀를 도의 길로 이끄는 것을 더 원하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불교계의 정신 자리라 할 것이다.

 

□ 기독교는 마산포에 천주교는 완월동에 두 유파가 있다.

완월동 쪽은 프랑스 사람이 이끌고 마산포 쪽은 한인이 이끌고 있으며 두 파 모두 한인만을 상대하고 있다.

여기에 다니는 한인들은 여전히 선도된 모습을 모여주지 못하고 있다. 협박, 허위, 절도, 사기, 속임 등 온갖 악덕스러운 문자(文字)에 신도들이 씌워져 있다.

신시에는 일본 기독교회가 있기는 하나 이 또한 상주하는 교사나 목사가 있는 곳은 아니다. 특히 신도 중에는 그 교리를 활용할 능력을 갖춘 이가 적고 고집스럽고 완고하여 세상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구래(舊來)의 신도도 도리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경향이 있어 보이며 교세는 거의 보잘것없고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는 감이 있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다섯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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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4

제5장 교육기관

 

일본인 아동의 교육기관으로는 마산거류민단이 공설(公設)한 마산심상고등소학교가 있다.

위치는 전에 신월동 지역 내에 있던 철도관리국의 소관지이며 신시와 마산포 사이에 있으면서 약간 신시 쪽에 가깝다. 그 소재지는 사방이 뚫려서 조금 높은데에 있기에 소학교의 위치로서는 최고라 하겠다.

 

<마산심상고등소학교 / 현 월영초등학교>

 

학교 건물은 1908년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 일본의 건국기념일)에 낙성식을 올린 것이다. 부지는 2,500여 평이며 교사 및 부속건물의 건평은 380여 평, 그 경비는 29,510여 원이 들어간, 항내(港內)의 장대미려(壯大美麗)한 큰 건축물이다.

이 학교는 1902년 11월 4일, 정토종 포교승 미스시다 지몬(三隅田持門, 삼우전지문) 스님이 혼자서 자금을 내어 신시의 남단에 일본소학교를 일으켜 생도 13명을 수용하여 개교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고 다음 해 11월에 마산심상소학교란 공인(公認)을 거치고 1906년 7월 관인을 얻고서 심상고등소학교가 된 것이다.

1907년 이후 통감부에서 연간 42원의 보조를 받기로 되었고 같은 해 일본 동궁(東宮) 요시히토(嘉仁, 가인) 전하가 방문했을 때 학사 장려하는 뜻에서 장려금 3백 원을 받아 바로 학교 기본재산에 산입하였고 동년 12월 12일, 양 폐하의 사진과 칙어(勅語)를 증여 받은 한국 내에서 몇 안 되는 학교 중의 하나다.

낙성식은 진해방비대사령관인 해군소장 미야오 나오키(宮岡直記, 궁강직기) 씨 및 진해만요새대대장 이하 관민 3백여 명을 초대하여 총감부 총무장관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학원정길) 이하 여러 명의 축사 낭독이 있었다.

당일 통감부의 부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根荒助, 증근황조) 씨로부터 건축비용 일부로서 5백 원이 정해졌다. 본교의 방침으로는 학사장려를 위해 수시로 학부형 회의를 개최하고 위생에 관해서는 직원과 아동들에게 매일 학교 안팎을 청소시키고 매주 한 번 대청소를 시킨다.

또한 매년 4월에는 촉탁 의사가 와서 위생 상태를 시찰하고 학생 전원의 건강진단을 실시한다. 눈병인 트라코마(角膜粒腫, 각막입종, 전염성 만성결막염)에 관해서는 특히 엄중한 예방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학생 수는 346명이며 그중 남학생이 160명, 여학생이 186명이다. 교장은 사가(佐賀, 좌하) 현 출신 나카지마 데이지로(中島訂治郞) 씨이며 교감은 다케시다 도모(竹下智) 씨, 이하 남녀 교사 5명과 한국 촉탁교사 1명이 지도하고 있다.

일단 소학교 전과(全科)를 졸업한 자는 별도로 보습과(補習科) 혹은 고등여학교나 중학교 등 설비가 없기 때문에 그 학식(學識)의 향상을 쉬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다. 그래도 진학하려는 자는 한국에 있어서는 부산이나 경성, 인천 이외에는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 참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교육과정은 일본과 연결되어 있어 전혀 다를 바 없을뿐더러 고등과에는 도리어 한국어 이수라는 부하도 있는 것이다. 매년 3월 시험을 실시하여 졸업증서와 수학증서를 수여한다. 봄, 여름 두 계절에 대운동회를 행하고 고등과 학생은 수학 소풍 여행을 실시할 때가 있다.

교육계에서 불리는 노래에 “노래(唱歌)는 부산, 수공(手工)은 마산, 도화(圖畵)는 경성, 도구(道具)는 원산, 유희(遊戱)는 인천”이라고 하여 그 특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수공은 마산소학교가 잘하는 분야일지 모르겠지만 유희도 아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인의 아동교육에 관해서는 마산포의 성호라는 곳에 공립마산보통학교란 것이 있다.

전 학급을 4학년으로 나누어 매 학년 50명씩 도합 200명을 수용할 예정이나 현재의 학생은 100명에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남학생이고 여자부의 설비는 없다.

한국 정부에서는 매년 360원, 지방청인 창원부는 230원의 보조를 주고 있다.

교장은 한국이이며 본과(本科) 훈도(訓導)로는 윤태권과 교감이자 일어를 가르치는 가고시마(鹿兒島, 녹아도) 현 출신의 구로키 겐지(黑木源仁), 두 사람이 있다. 그 외 부훈도가 두 명이 있다.

교사(校舍)는 융희 2년 즉 1908년 3월 10일 봄날의 좋은 시기에 낙성식이 거행된 것이다. 당일 낭독된 축사는 아래의 한 건이며 뒤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나머지는 식사(式辭)와 축전에 불과했다.

 

공립마산보통학교의 낙성식을 경축드리며

장가(長歌, 5자 혹은 7자로 짓는 일본 시가인 화가. 끝에 만가를 따른다.)

융희 2년 무신년 2월 초 일본 재야의 신하 스와 부고츠(諏方武骨)

 

“장차 향기롭게 성장하는 아이들이여 학창에서 보이는 뜰의 꽃들과 같구나.”

운운(이하 시가의 번역은 생략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네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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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3

제4장 위생 및 의료

 

공중위생으로는 1906년(명치39년) 가을에 비로소 대청결법(大淸潔法)이 제정되어 매년 봄가을 두 계절에 집행을 보게 되었다. 또한 청결사(淸潔社)라는 회사가 있어 한인 인부들이 매일 일인 감독의 지휘 하에 쓰레기차를 몇 대 돌리면서 집이나 가게 앞의 쓰레기 함에 모아둔 것을 수거해 간다.

종두(種痘)는 매년 두 번 봄가을에 장려되었다. 마산포의 거리에서도 청결차가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종래부터 일인들이 곤란하게 여긴 것은 화장실 청소에 관한 일이다. 한인들은 일정한 시기를 빼고는 분뇨를 비료로 쓰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논밭에 시비를 할 때 이외에는 분뇨가 많이 남아서 한계에 도달하면 돈을 주어 투기하도록 했다. 청결사가 조직된 이래 이 회사는 연락을 받으면 이것을 날라 버리고 거류민은 이 회사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묘지와 화장터는 신월동 지역의 산기슭에 있고 묘지에는 일본 전관(專管)과 각국의 두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토장(土葬)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간 사람이 나오면 민단의 시설인 화장장에서 화장을 해야만 한다. 묘지에는 뼛가루만 매장하는 것뿐이며 여태껏 여기에 매장된 일은 없다. 단지 신생아의 옷이 매장되어 있다.

 

<당시 일본인 공동묘지와 피병원>

 

피병원(避病院,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병원)도 신월동 지역에 있어 1907년에 한 명의 콜레라 환자를 수용해 왔으며 연간 한두 명의 이질 환자를 수용했을 뿐이다.

각기병(脚氣病) 환자는 우기 혹은 여름에서 가을에의 장마철에 발생할 때가 있으나 극히 적다. 대개 한국의 공기는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각기 환자가 많다는 것은 다소 이상한 감이 들기는 한다. 마산에서는 이 유례를 벗어나 각기 환자의 전지요양지(轉地療養地)로서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보양지라 하겠다.

기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또한 건강에 신경을 별로 안 쓰는 한인들 사이에 간혹 천연두나 홍역 등이 유행하고 그 여파로 일인에게도 옮겨진 경우도 있는데 아주 드물다. 페스트 병은 아직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콜레라는 부산에서 그 계통의 병이 전염되어 1907년 10월 중에 4명의 환자를 내었는데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확산되는 일은 없었다. 1908년 6월 하순부터 소아(小兒) 디프테리아 환자가 2,3명 나왔으니 빨리 발견되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마산에는 지방 풍토병이라 명명할 만한 병도 없다. 특히 전염병은 대체로 느슨한데다가 그 세균이 겨울의 극렬한 추위 때문에 동사하고 그 여독을 다음 해에 끼칠 것도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베풀어주신 은혜일지도 모를 땅, 낙원이라 하겠다. 전지 요양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기관으로서는 이사청 보호 아래 세워진 마산병원이 신시의 남쪽 하마마치(빈정 濱町, 현 창포동) 3정목에 있었는데 1909년 9월 초순, 전에 신월지역에 있던 철도관리국 소관의 토지와 가옥을 빌려서 거기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 75명의 화양(和洋, 왜식과 서양식) 절충의 건물을 건설하고 있으며 의무, 내과, 수술, 안과, 해부, 저약(貯藥), 조약(調藥,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서 약을 조제함), 접수, 환자대기실로 나누어 쓰게 된다. 빌린 가옥 네 동 중 세 동의 방 12개를 병실로 쓰게 되는데 특등부터 3등까지 나눈다. 게다가 저빙고(貯氷庫)까지 짓는다는 계획이다.

본 병원은 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앞으로는 장군산의 산들이 있고 그 산이 내려오는 높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후방은 마산만의 매축지를 눈 아래 두고 각 병실은 다 동쪽을 향해 해돋이를 보게 되어 있고 매축지 너무 마산만에 떠다니는 배가 보이는 조망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정경이라 한일 양국을 통틀어 이렇게 좋은 병원 건축의 적지(適地)는 없을 것이다.

이 청정한 공기에다가 산과 바다의 조망을 갖춘 병실은 약의 효과 이외로 위안의 효력을 자아내므로 그 치료 시기를 앞당기는데도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마산포에 분원을 경영하며 후쿠오카 출신의 활달하고 친절한 해군 2등 군의관인 하라다 히코지로(原田彦次郞)가 주임으로 종사하고 있다.

그 외 개업의원으로는 신시 혼마치(本町, 현 월남동) 1정목에 오카바야시(岡林 강림) 의원이 있다. 원장 오카바야시 도지로(岡林藤次郞) 씨는 특히 외과, 위장, 화류병과(花柳病科)에 능숙해 찾아오는 환자로 많은가 보다. 또한 완월교 부근에 오오카(大岡) 의원이 있으며 오오카 키(大岡規, 대강규) 씨는 에히메(愛媛, 애원) 현 무사 집안 출신이며 내외과와 소아과를 잘 봐서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환자가 계속 문전에서 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마산포 신마치(新町, 현 추산동)에는 산과, 부인과, 소아과를 잘보는 고세이(弘生, 홍생) 의원이 있고 신월동에는 요쿠라(興倉, 흥창) 치과 전문의가 있다. 수의(獸醫)로서는 마산포 신마치에 개원하여 경찰 수의사로 촉탁된 야마구치 가나우(山口叶, 산구협) 씨가 있다. 또한 신시 혼마치 2정목에 있는 인풍당(仁風堂) 약국의 이이츠카 추타로(飯塚忠太郞, 반총충태랑) 씨는 약제사로서 수질 및 우유 등의 검사를 할뿐더러 청결사 사장으로서 공중 위생 집행에도 입회(立會)하고 있다.

산파(産婆)로는 마산포에 오카모토 나츠(岡本なつ), 신마치에 유카다 우미에(湯川うみえ) 니시하라 마스에(西原ますえ), 구리하라 도요(栗原とよ)란 네 여사가 조산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실력에 얀간 차이가 있다 해도 모두 상당한 학술과정을 마친, 면허를 가진 이들이다.

이 지방은 소(牛)의 명산지이며 그 숫자도 많으며 공기가 건조하여 소의 병도 적은 편이다. 그래도 한 번 병이 번졌다 하면 참사를 이룬다고 한다. 닭 콜레라도 간혹 유행할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극히 드물다.

의료계에서도 페스트 예방을 위해 도쿄(東京) 식으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을 권장하면 어떨까. 일이 발생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법. 이 항구처럼 해륙의 출입이 빈번한 곳에서는 언제 그 균이 들어올지 모른다. 나쁜 역병이 유행하고 나서 비로소 대청소는 한다는 꼴이 된다면 최악 중의 최악이 아니던가.<<<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세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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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8. 00:00

마산번창기(1908) - 12

제3장 지질 및 기후

 

마산 부근 일대는 제3기층에 속하는 데가 많고 산이나 계곡에는 화강암 또는 결정편암(結晶片巖)을 노출하고 있는 데가 있다.

해변 및 평야는 주고 제4기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지미(地味)는 기름지고 좋다. 논에서는 쌀과 보리를 이삼모작(二三毛作)으로 짓고 밭에는 보리와 채소를 이모작하는 것은 다른 데와 같다.

 

 

거친 땅을 개척해 비료를 주지 않아도 여러 종류의 과일, 채소, 곡물이 알차게 자란다. 산악지역은 노출된 바위가 많고 거목이나 울창한 숲은 드물지만 산 중턱과 산 아래 평기의 묘역에서는 소나무가 성긴 숲을 이루기도 한다.

또한 신시 부근 혹은 관공서 소유지로 남별을 피한 곳에는 모두 소나무가 무성하다. 이러다보니 식림(植林)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한 사업이라 하겠다.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면 지금으로부터 백 수십 년 전까지는 깊은 숲이 도처에 있고 거의 햇빛도 들어오지 못할만큼 나무가 많았는데 나라에서 온돌이 유행한 이래 어린 나무와 뿌리까지 연료로 채굴되어 오늘 날과 같은 처참한 풍경을 보게 된 것이라 한다.

계곡 물의 수량이 비교적 적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탓으로 비가 올 때마다 계곡이 범람하고 논밭을 해치는 것과 동시에 그 토사가 마산만 바닥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식자(識者)의 지적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다 아는 바인데 당국자는 특히 깊이 유의해 주길 바란다.

우물에 관한 한, 어디를 파나 물이 나오지 않는 데는 없으나 마산포의 일부분과 신시 매립지에서 나는 물은 수질 검사 결과 염소가 다량 함유되어 있어 비록 여과를 한다 해도 음료수로는 적절치 않다고 한다. 기타의 우물은 여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음료수로 제공이 가능할뿐더러 차 끓이기에도 딱 적당하다.

그 중에서도 이사청 및 우체국의 물은 우수한 물이기는 하나 감미롭고 상쾌한 맛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본다. 산기슭이나 높은 언덕에 있는 우물은 다 천연의 지하수인지라 가뭄이나 우기에 관계없이 그 수량이 증감될 일은 거의 없으나 요 근래 수년 사이에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물은 비가 지중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라 평소에는 무미투명(無味透明)한 물도 때때로 그 맛과 색상이 다를 때도 있다. 또한 청결한 수질도 통과하는 지질에 따라서는 냄새가 나거나 철분을 포함할 때가 있다.

기온은 관측소의 설비가 없으므로 확실한 것은 말하지 못하겠지만 매년 극서(極暑)는 7월 중순부터 8월 상순 사이이며 화씨 98도(섭씨 36.6도)를 넘을 때는 없고 극한(極寒)은 1월 중순부터 2월 초순 사이에 있으며 최저 화씨 26도(섭씨 영하 6도) 이하로 내려갈 때는 드물다. 눈은 거의 오지 않으며 눈이 쌓인 것을 본 적이 없다.

풍향은 여름에는 남풍의 계절이며 바다 위를 스쳐오는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고 실내에 있어서도 그 열기로 불쾌해지는 일은 없으며 간혹 소나기가 올 때도 있어서 지열을 식혀 주기도 한다.

한국의 우기에 관해서는 한국 속담에 삼음사시(三陰四時, 三陰四晴의 오식誤植)라는 말이 있다. 사흘 비가 오면 나흘 갠다는 말이다. 천둥벼락은 극히 적고 낙뢰가 내리는 일은 십 수 년에 한두 번 밖에 없으리라.

초가을부터 바람은 동풍으로 바뀌고 계속 비가 올 때가 있다. 낙동강의 본 지류가 범람하여 교통기관에 피해를 주는 때는 바로 이 때이다. 반딧불이가 한창인 이때, 늦가을까지 파란 빛을 보이며 동서(東西)로 날아가는 것은 일인(日人)에게는 신기한 현상으로 보이낟. 만추에 들어서면서 풍향은 바야흐로 동북으로 변하면서 겨울에는 온전한 북풍으로 변한다.

찬바람이 불면 그 차가움이 살을 찌르는 듯하며 물받이 수통의 물이 3센티 정도까지 얼음이 되기도 한다.

이 계절 집에서는 난로 혹은 고타츠(火燵)로 난방을 하는데 한옥 집에서는 모두 온돌이라고 하여 바닥 밑에서 땔감을 태우며 난방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류민 중에 한인의 방을 빌리고 있는 사람들은 초겨울부터 온돌을 사용하여 기상을 하는데 계절이 마치 봄이나 가을과 같이 느껴져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온돌의 따스함을 잊지 못하겠다고들 한다.

극한의 날씨도 2, 3일로 끝나고 5일 이상 계속되는 일은 없다. 바로 기온이 올라가서 얼어붙은 것은 녹이게 하여 따사로운 초봄의 나날이 계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변화는 삼음사청과 더불어 한국에 특유한 삼한사온(三寒四溫)의 계절적 특징 때문에 기인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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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1

마산의 관공서 - 5

 

□ 민의소(民議所)-마산포 소재(전 마산보통학교 터)

이것은 한인(韓人) 측의 자치기관이며 마산포 읍내 6개 동의 하급 행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이 사무소에도 역시 민의소장과 부소장이 있고 의원도 있지만 그 의사(議事)나 역소(役所)의 모양새는 볼 것이 없다.

명치유신 때 일본에서 이루어진 그것보다 더 유치한 것이거니와 사무소는 담배 피우는 휴게실 모양이다.

 

 

□ 창원재무서(昌原財務署)-마산포 소재

한국정보의 탁지부(度支部) 직할로 지방의 조세 등을 정리하는 기관이며 서장은 재무관인 한인인데 재무보좌관으로서는 일본인이 주로 책임지고 집무하고 있다.

그 위치는 오산으로 명태어 회사 남쪽 앞에 있는, 전에 한국척식회사 마산출장소 건물이었던 곳에 건물을 빌려 쓰고 있는데 현재 마산포 신마치(新町)에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다.

 

□ 창원금융조합-마산포 소재

한국정부의 탁지부가 자본금 1만 엔을 지출해 한인에 대한 소규모의 금융기관으로 만든 것이며 재무서에 부속되어 있으며 상당한 저당을 잡아서 저리로 대부를 해주는 곳이다.

말하자면 농공은행의 소규모 판인데 그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들여온다. 이 조합은 창원부는 물론이고 함안, 진해, 고성, 진남(鎭男, 진남군 1900년-1909년. 현재의 통영시),웅천 등지까지 설쳐 활동한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한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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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10

마산의 관공서 - 4

 

□ 마산거류민단역소(馬山居留民團役所)-신시 사카에마치(榮町, 홍문동) 소재

1899년(명치 32년) 7월에 조직된 일본거류민회의 총대(總代) 사무소가 진화한 것이며 그 후 총대를 이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사무소의 명칭은 그대로이다.

1904년(명치 37년) 5월 총대사무소는 처음으로 민간사무소 즉 민역소로 개정되어 이사는 민장(民長)으로 개명되었다. 이때 가고시마(鹿兒島) 현(縣) 사족(士族) 출신으로 한해어업조합(韓海漁業組合) 마산지부장인 미야하라 가네유키(宮原兼行)가 민장으로 추천, 선임되었다.

1906년(명치 39년) 9월 1일, 일본한은 통감부의 고시에 따라 거류민 단체를 만들고 미야하라 씨를 거류민단 민단장 대리로서 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민단제도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은 부산거류민단사무소의 제1과장인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를 민장으로 영입할 것을 의결하였다. 마에다 민장이 착임(着任)함으로써 마산의 발달을 진심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자치제도는 크게 진보한 점이 있지만 거류민이 납부하는 민세(民稅)는 더욱 증대된 것이다.

1908년도(명치 41년)는 우선 호별세, 상업세, 공업세, 잡종세의 4개 종목이었으나 다음 해부터는 가옥세도 부과하게 되었다. 마에다 민장은 효고(兵庫) 현 출신으로 영리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자치기관의 수장으로서는 다소 침착한 태도가 결여된 감이 있다.

침착성이 부족한 것이 평민들과 사귈 때는 무난하게 지나가지만 감독관청이나 다른 관리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비굴하기까지 하다. 좀 더 오기를 가지고 버틸 때는 버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종종 나온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마에다 민장은 극장장인 좌장(座長)으로서의 관록이 부족한 점이 보인다고나 할까. 이것은 결국 그 사람의 학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좌중을 다스리는 힘이 있으면 숨기고 있던 일이나 정체를 드러내는, 마각을 드러내 놓고 자신의 역할 정도는 감당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에다 에이이치(前田榮一) 마산거류민단장 / 사진은 『마산과 진해만』(1911) 에서 가져옴>

 

오로지 자기 자리에만 연연하여 주의 주장과 의리 인정 등의 교제에서 너무 글 읽는 식의 일방적 방식을 집어치우고 거류민의 행복을 위하여 또한 마산의 발전을 위하여 결연한 의지와 여론을 모으고 만약 이것을 철저히 해내지 못할 때에는 그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겠다는 용맹스러운 정신과 기상이 있으면 마산의 동정을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회계역(會計役)은 다수미 소지(田角宗治)로 많은 사무는 그의 수완에 의해 결정되니 민장 이상으로 더욱 노련한 사람이란 평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는 바로 판정하기 힘들다. 다수미 씨는 성실한 정신에 명석한 두뇌를 갖고서 사무를 처리하과 교제 면에서도 온화한 호인이라 하겠다. 현재 민단 사무소에 대한 여론의 일반(一斑)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민장은 고관대작인 양 집무실에 처박혀 있지 말고 창구로 나와 원활한 사무 처리를 도모할 것

* 민단 직원들은 위생의식이 확실한 자를 채용할 것

* 일본 및 한국의 관보, 통감부보(統監府報) 등도 대기석에 비치하고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할 것

* 거류민이 직접 관계된 규칙이나 공시 서류는 마치(町)마다 혹은 각 구(區)마다 대표를 정해 그 집에 교부하여 비치하도록 할 것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를 줄인다는 것은 상투적인 말일뿐더러 말은 해도 쉽게 실행되지 않는 사정도 있을 줄 한다. 거류민의 행복과 마산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부과되는 세액이 지금의 배가 되어도 쓴 소리는 나오지 않으리라. 민회 의원도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안 된다.

장식적인 조각 같은 기관에 아무리 많이 인형 같은 인원을 앉혀 놓아도 인형 같은 의원을 몇천 개 가져다 놓아도 그야말로 경비만 증대할 뿐 마산과 거류민을 위하기에는 개똥만도 못한 것이다.

어쨌든 민단 직원이든 민회 의원이건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비열한 생각은 깨끗이 씻어 버리고 친절이란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겨 두고 직함의 명예는 자랑하되 그것을 이용하려는 허영적인 욕정일랑 불길 속으로 던져 버리고 일본혼(日本魂)이라든가 무사도(武士道), 공정함, 도의와 인덕, 예절 등의 간판은 양 어깨에 달고 여론을 따르게 된다면 민단 사무소의 훌륭한 건축이 가능해질 것이며 민회 의사당도 세우질 것이다.

거류민이 민세가 높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쓸데없는 인원과 경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설치한 기관이 아무리 기름을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기관이 원만하게 운전되어 간다면 다소 이치를 아는 일본인이라면 민세가 높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 변두리 지역에 요리집으로 임차된 세집이 바로 민단 역소 맞은편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거류민으로서는 참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열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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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번창기(1908) - 9

마산의 관공서-3

 

□ 마산경찰서-신시 토모에마치(巴町, 대외동) 소재

각국 거류지회 조직과 더불어 각국 경찰 사무를 보기 위해 설치된 것이며 새로 신축할 곳은 마산정차장 앞 철도관리국 소관지를 예정하고 있다. 아마 1909년(명치 42년)에 기공할 것으로 보인다.

영사관 소속의 경찰관은 애초부터 그 사무를 겸무하고 있었고 경부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생몰년미상, 개명 전 이름은 사카이 에키타로 境益太郞. 1899년 4월부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주석경부로 1900년 9월까지 근무 후 같은 해 11월부터 1906년 1월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관 주석경부로 근무했다)가 서장이었다.

그 후 서장은 엔도 다다오키(遠藤忠興), 사카이 요시아키(재임), 경시(輕視) 미야가와 다케유키(宮川武行)로 교대했다. 1908년(명치 41년) 6월 미야가와 경시는 전라남도 경찰부장 겸 전주경찰서장으로 전임하고 목포 결창서장이었던 미치노 요시키치(道野能通) 경시가 후임자로 들어왔다.

착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시정(施政) 방침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관권평민(官權平民) 절충주의(折衷主義)를 중시하는 모양새이다. 나가사키(長琦) 현 쓰시마(對馬) 출신인데 오랫동안 후쿠시마(福島) 현, 아오모리(靑森) 현에서 경찰관 생활을 해서 그런지 동북지방의 기풍에 물들여져 단호하고 늠름한 기상을 지녔다.

차석 경부는 후쿠야마 쵸베에(福山長兵衛)로 가고시마 현 출신이며 민완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경찰서의 부속기관인 마산포 경찰관 주재소에는 한인인 경부 전태홍을 비롯하여 일인 순사부장 이하가 주재하고 있다.

주재소에 경부와 순사부장이 동시에 주재하고 있는 데는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점이 바로 마산포의 인구가 많으면서 융성하고 있는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마산경찰서. 1909년 초 순종의 마산순행 때 촬영한 사진>

 

□ 마산우편국-신시 혼마치(本町 4정목, 월남동 4가) 소재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부터 마산포에 설치되어 1900년 4월에 신시의 민간 가옥을 임차하여 사용하다가 같은 해에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여 입주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국장은 도조 겐타로(東條源太郞) 씨로 적은 도쿄에 두고 있지만 원래는 후쿠시마현(福島縣) 출신이라 활발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이 있다. 따라서 직원들도 평민주의를 취하고 만사가 잘 흘러간다고 한다.

당국도 신축 이전지를 마산정차장 앞 바로 마산경찰서 신축지의 북쪽에 예정하고 있어서 예산이 성립되는 대로 기공될 것으로 보인다.

 

<마산 우체국>

 

□ 각국거류지회-신시 아케보노마치(曙町, 청계동) 소재

마산경찰서의 동쪽에 인접해 있고 각국 거류지 및 거류민의 이해득실을 연구 심리하는 곳이다.

회장은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씨이며 현재 회원은 러시아 영사 바실리예프(러일전쟁 이후인 1907년 새로 부임해 온 마산 주재 러시아영사관 영사), 창원부윤 신석린 및 지주의원(地主議員)으로서 제일은행 대표자인 니시카와 다로 이치(西川太郞一) 씨 등이다.

 

□ 마산해관(馬山海關)-신시 혼마치(本町, 월남동) 소재

부산세관의 지서이며 지서장 이하 집무자는 거의 일본인이지만 한국 정부에 고용된 관리자 중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나 외국에 나갈 수출품을 검사하며 정규 과세를 수행하려는 한국 정부에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사복(私服)을 채우는 자들이 있어 거류민의 동정을 얻기 힘든 경우도 있다.

현재 지서장은 아시이 히코조(石井彦三)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아홉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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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11. 00:00

마산번창기(1908) - 8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2

 

□ 러시아 영사관(露國領事館)-신시 다이마치(臺町) 소재

마산이사청의 구청사를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붉은 벽돌 벽에 유리창이 있는 건물이 나온다. 이것이 러시아 영사관이고 지금은 영사 대리인 한 명과 한인 주방장이 있을 뿐이다.

1901년에 지어졌는데 당시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나 지금은 찾아올 사람도 별로 없고 사무도 뜸하여 찬적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경내에는 소나무가 우거지고 초록이 깊어서인지 냉랭한 분위기조차 감돌고 있다.

 

<러시아 영사관>

 

□ 창원부청(昌原府廳)-마산포 소재

왕년에 조창 건물로 사용하던 것을 수리해서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가 쓰고 있던 곳이다.

 

<창원부청으로 사용된 조창 건물의 유정당>

 

감리서는 광무 2년 즉 1898년(명치 32년) 2월 마산개항 칙재(勅裁)에 의해 설치되어 주로 개항 준비를 위한 사무를 보던 곳이며 그 우두머리를 서리(署理)라고 불렀다. 감리서의 서리는 창원군수를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군내의 사법, 행정 사무가 같이 처리되었다.

그러다가 광무 10년 즉 1906년(명치 39년) 말에 폐지되었다. 동시에 창원군은 창원부(府)로 승격하여 부윤(府尹)을 두게 되었고 마산이사청을 상대로 한인(韓人) 및 한일인(韓日人) 관계의 행정사무를 보게 했다.

또한 창원항재판소를 두고 법무보좌관보로서 이토(伊藤)한 사람이 그 임무를 맡게 되고 주로 한인의 민형사 사무를 종사케 했다.

당시의 부윤은 이기(李琦, 1855~?.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친일관료. 1906년에 창원부 감리 겸 창원항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이어 경주군 군수가 되었고 190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체제에서 충청남도 평택군 군수와 은진군 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씨인데 1908년(명치 41년) 이 부윤은 경주군수로 전근하고 웅천군수 신석린(申錫麟, 1865~1948. 일제강점기 경남 참여관, 충남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친일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1906년 경상남도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을 시작으로 1906년 웅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08년 창원부윤을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0월 경상남도 참여관이 되었다.) 씨가 후임으로 승진해 왔다.

같은 해 7월까지 재판권은 모두 진주구재판소(晉州區裁判所)로 이관되어 지금은 행정사무만을 본다. 웅천, 진해(구 진해현 지역)의 양 군수도 겸하고 있어서 신 부윤은 다망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신 부윤은 경기도의 인간 개진주의(改進主義)의 인맥으로 친일파에 가까워 일본인들의 평도 좋다. 일본 말도 다소 아는가 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여덟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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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4. 00:00

마산번창기(1908) - 7

제2장 마산의 관공서 - 1

 

□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신시(新市) 다이마치(臺町) 소재

언덕 위의 조망이 좋은 데에 있으며 1899년(명치 32년) 개항 당시 부산 영사관의 분관으로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로 하여금 건축하게 했던 것을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규모가 작고 그 위치가 놓은 데 있어서 사람들이 불편해 하니 이사관 미마스 구메키치(三增久米吉, 1861~?. 1901년부터 서울 일본영사관 영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발령받았다. 이후 계속 이사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초대 마산부윤으로 임명받은 뒤 1919년 11월까지 부윤으로 있었다) 씨가 1908년(명치 41년) 5월 그 북쪽 위치에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공사는 아직 낙성을 못 보았지만 그 건축물의 수려함은 마산에서 으뜸이라 한다. 아마 11월 3일 천장절(天長節, 1896년에 제정된 메이지 일왕의 탄생 축일로 날짜는 11월 3일이었다. 1927년부터 1947년까지는 명치절로 불렸다)이란 좋은 날을 잡아 낙성식을 거행할 예정이라 생각한다.

이사관 관저는 이사청 뒤의 언덕에 있으며 1907년(명치 40년) 9월 중에 신축이 시작되고 미마스 이사관이 스스로 위치를 정하고 설계한 것인데 조망 좋은 터에 수려하게 세워져 있다.

 

<1908년 말 준공한 마산이사청(현 경남대 평생학습원). 뒤쪽 건물은 미마스 이사관이 살았던 관저(현 마산종합사회복지관)>

 

미마스 이사관은 야마구치(山口) 현(縣) 옛날 하기번(萩藩) 출신이며 1860년(명치 17년) 생이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농학사이며 열정적이며 호걸 같은 사람이다. 거기에다 성결이 강직하고 쉽사리 자기 소실을 꺾지 않는 점은 무사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미마스 씨는 1887년 외무성에 들어가 1888년 7월에 독일 브레멘 영사관에 부임하고 그 후 함부르크와 베를린 영사관에 근무하며 후쿠시마(福島, 후쿠시마 야스마사 1852~1919. 일본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육군대장) 장군이 필마단기도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을 때에 성심껏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

1895년 9월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바로 하와이 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임되었고 1898년 귀국하여 5월에 마닐라 영사도 전임되었다. 당시는 때마침 미국-스페인 전쟁(米西戰爭) 중이었다. 1900년 4월까지 거기서 근무하였다.

같은 해 7월에 한국 경성 주재 영사가 되어 러일전쟁의 비상한 시기에 공로를 아끼지 않았다.

1906년 7월에 한국통감부제의 실시로 마산주재 영사였던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1872~1941, 1902년부터 1906년 1월 31일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로 근무하였다. 영사관이 페지되고 이사청이 설치되자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잠시 근무 후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통감부 서기관을 겸임하면서 1910년까지 경성 이사청 이사관으로 근무했다.) 씨가 경성이사청 이사관으로 전직하게 되자 미마스 씨가 그 후임으로 경성 영사에서 마산이사청 이사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미마스 씨는 이렇듯 외교관의 경력만을 가진 사람이라 교제가로서는 평민적인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의 동정은 얻지 못하는 편이다.

문필을 업으로 하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개방적이며 위세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소박하고 솔직한 점으로 관리에 딱 맞는 사람이라 하겠다. 단도직입적인 면도 있으나 세평에서 말하는 관권(官權) 만능주의자라는 지적은 맞는지 모르겠다.

부이사관인 와다 시로(和田四郞)도 역시 야마구치 출신이며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서 지방재판소 판사를 지낸 사람이다.

온건한 성격으로 자만심을 드러내 놓지 않는 사람으로 현재는 민형사(民刑事)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공명정대한 수완을 발휘하여 교제 석상에서도 원활한 자세로 칭찬받는 진지한 서생(書生)과 같은 사람이다.<<<

 

이 글은 창원시정연구원이 올 초에 번역한 『馬山繁昌記』(1908) 중 일곱 번째 것이다. 그림은 별도로 삽입하였다. 『馬山繁昌記』는 1900년대에 발간된 일본 문헌 중 단행본으로는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항 이후 마산으로 몰려 들어온 일인들의 수는 1908년 6월 3천355명에 달했다. 같은 통계로 한인은 7천515명이었으니 당시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당시 마산은 '번창'해 가고 있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일인들에게 마산은 꿈을 주는 신도시였다. 책의 제목과 내용은 이런 시대 상황과 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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