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351 한국100명산. 2. 둘레길 800리 지리산 ♪ 준비과정 1. : '한국 100명산'을 지난달 부터 시작하고 뭔가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산은 어디냐? 그리고 그 다음산을 우짤끼고! 이러 저러한 산의 선택과 함께 셋째주는 내가 안되고, 그 다음주는 누가 무슨일로 않된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많읍니다. 한달, 긴거 같지만 이런 저런 계획잡다보면 한달이 후딱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번 지리산은 8월에 가기로 했었고, 7월은 포항에 있는 산을 가기로 했었는데, 근데 그게 헸갈렸나 봅니다. 워낙 계획이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덜렁 '세석산장'을 예약을 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약을 맘먹고 해도 잘 되지 않는데, 이와 된거 그냥 갑시다."라는 여론에 의해 지리산을 가기로 했습니다. ♬ 준비과정 2. : 모처럼 1박 산행을 한다고 하니 준비.. 2013. 7. 26.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3 이번에는 창원도시철도 타당성 평가에서 '자동차 이용객 유입' 부분과 '수요 예측' 부분입니다. ○ 자동차 이용객 유입 문제 창원시는 자동차 통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다음 세 가지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1) 팔용산 터널 ; 왕복 4차선으로 올해 착공해 2018년 쯤 준공한다는 계획이며 민간 기업이 추진합니다. 2) 제2 봉암교 ; 3천2백 억이 소요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해저터널 1.3km를 포함 총 연장 2.9km이 이르는 왕복 4차선 도로를 놓게 됩니다. 3) 봉암교 확장 ; 현 봉암교에 왕복 2차선을 붙여 내는 공사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 6차선이 8차선으로 넓어집니다. 3백 억이 드는 사업인데 공사가 확정되어 불원간 착공합니다. 이와 같이 터널과 교량공사가 .. 2013. 7.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1)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네 곳을 소개합니다. 양조장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16. 청수(淸水 / 시미즈) 양조장 1921년 창업하였고 신창동, 현 무학아파트 자리(전 무학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만주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大正櫻(대정앵)’과 ‘井筒平(정통평)’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장이 있던 곳 옆을 흐르는 창원천(대곡천이라고도 함)에는 이 공장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청수교(淸水橋)가 있습니다. 17. 원등(遠藤) 양조장 1909년에 창업하였고 장군동에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건물 보존 여부를 놓고 논쟁거리가 되었던 천도원(千島園)주조장이 바로 이 양조장입니다. 상표는 彌生(미생)이었.. 2013. 7. 22.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2 지난 7월 5일 창원시의회에서 있었던 「창원도시철도 약이 될까? 독이 될까?」라는 제목으로 시민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가능한한 저는 지난 번 포스팅 했던 두 분의 주장과 다른 것을 찾아보려고 애썼습니다. 타당성평가에서 최종안으로 제시된 노선을 직접 왕복 답사하면서 눈으로 확인하면서 문제점이 없는지 살폈습니다. 하지만 타당성평가서의 전체 내용을 못보고 공청회 자료만 볼 수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심도 깊은 분석도 불가능했습니다. 이 글은 공청회 때 배포된 타당성평가서에만 근거했습니다. 내용은 정체 현상, 공사비 증액, 자동차 이용객 유입, 수요 예측, 차량 시스템 등 다섯 가지입니다. -창원 도시철도 타당성 평가 용역에 대한 의견- ○ 정체 현상 문제 교통 정체 현상에 대해서.. 2013. 7.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0) - 강점제3시기 이번에도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모두 당시 유명했던 일본 청주 공장들입니다. 13. 월포(月の浦) 양조장 장군동 경남데파트 뒤편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회사가 사용했던 술통도 함께 소개합니다. 14. 삼호(三好 / 미요시) 양조장 1913년에 창업하였고 부림동 아래에 있었습니다. 상표는 ‘松の色(송색)’이라고 했습니다. 15. 산읍(山邑 / 야마무라) 청주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만주에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櫻正吉(앵정길)’이었고 지금 중리에 있는 무학주정 전신입니다. 2013. 7. 15.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1 7월 5일 오후 2시 창원시의회에서 「창원도시철도 약이 될까? 독이 될까?」라는 제목으로 시민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이 글은 토론회에서 밝힌 창원도시철도에 대한 창원시의회 김석규 의원의 발제 내용과 지난 6월 11일 창원도시철도 시민대책기구 창립총회에서 밝힌 창원YMCA 전점석 명예사무총장의 발제 내용입니다. 제 생각은 다음 번에 올리겠습니다. 우선 창원시의회 김석규 의원이 토론회에서 밝힌 내용을 소개합니다. -창원도시철도 현황과 문제점- ○ 도시철도 도입 효과에 대한 의문 도시철도의 필요성에 대해 ‘자동차 증가율 억제’와 ‘교통혼잡 완화’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승용차 이용자가 승용차 대신 도시철도라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 피크타임 때의 교통 혼잡구간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 2013. 7.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9)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양조장 세 곳을 소개합니다. 10. 빈전(濱田 / 하마다)양조장 1923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금배빈학(金盃濱鶴)이었습니다. 추산동에 있었습니다. 11. 서전(西田 / 니시다)양조장 1907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계림(鷄林)이었습니다. 위치는 홍문동, 즉 현 신동아빌라 자리입니다. 마산의 토호 이승훈 씨가 운영한 백광청주가 바로 해방 전 이 회사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양조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 촌기(村崎 / 무라자키)양조장 1925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염록(艶錄)이었습니다. 홍문동에 있었습니다. 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는 1923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앞 건물은 사무실, 뒷 건물이 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3. 7.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8) - 강점제3시기 오늘은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석교양조장, 원전양조장 사진을 소개합니다. 1.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사진입니다. 현재 통술거리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입구 오른쪽 건물은 현재도 똑 같은 모습의 건물이 있습니다만 동일한 건물은 아닙니다. 아마 저 건축물이 갖은 상징성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지은 것 같습니다. 2. 석교(石橋 / 이시바시)양조장 1905년 설립되었으며 서성동 덕천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후에 대흥주조라는 이름으로 문삼찬 씨가 경영하였습니다. 상표는 대전정종(大典正宗)이었습니다. 3. 원전(原田 / 하라다)양조장 1904년에 설립한 마산최초의 일본 술 공장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즈마(東)주조장이었습니다. 상표는 '한목단'이었고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2013. 7. 1. 한국100명산. 1. 낙타등 같은 지리망산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게 된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등산에 있다고 봅니다. 유독 우리나라에 등산인구가 많은 까닭은 쉽게 돈들이지 않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등산관련 아웃도어 의류 및 용품이 대형매장 매출에 지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등산바지, 등산티. 심지어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계셔서 저는 금면 초부터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토요일 모여서 무학산 둘레길을 3시간 정도 걷는 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걷는 속도들이 빨라서 따라가기 숨이 헉헉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너달 하고 보니 빠른 속보를 .. 2013. 6.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7) - 강점제3시기 오늘 소개할 사진은 마산역, 마산우편국, 도립마산의원 순서입니다. 1. 마산 역 현재 마산중부 경찰서 앞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에 있었습니다. 1905년 목조 일식으로 단층이었습니다. 1905년에 경부선과 함께 개통된 철도 마산선의 종착역이었고, 1925년에 개통한 철도 경남선의 출발역이었습니다. 이 역에서 출발하면 삼랑진을 거쳐 서울과 부산으로 연결되었고 함안 군북을 거쳐 진주까지 연결된 유서 깊은 역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마산우편국입니다. 2. 마산 우편국 현재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마산우체국의 전신입니다. 우편국을 통해 모든 정보와 통신이 연결되었던 시절, 마산의 가장 첨단시설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30년에 지었으며 약 300평 규모였습니다. 20대 초반 때 우표수집 한답시고 저도 자주 들락거.. 2013. 6.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에 예고한대로 오늘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서는 본판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이고 원판 사이즈가 가로40mm×세로30mm 밖에 되지 않아 상세하게 감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냥 1930년대 마산도시의 분위기만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1. 마산부청 중앙동 3가에 있는 현 마산합포구청, 즉 오랫동안 마산시청으로 이용되었던 위치에 있었었던 건물의 최초 모습입니다. 마산시민들에게는 약간 낯이 익은 건물일 겁니다. 2.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원으로 지방법원이 이전하기 전까지 마산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3. 마산경찰서 중앙동 2가에 있는 옛 마산경찰서,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건.. 2013. 6.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65) - 강점제3시기 이번 회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아래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리플렛과 리플렛 속에 들어 있는 마산 지도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만 지도의 아래위에 실린 사진은 처음 소개합니다.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3/0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이 리플렛은 1937년에 제작 발행되었습니다. 일본관광객 유치용 마산 홍보 혹은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 도시를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리플렛입니다. 「觀光の馬山」이 발간된 1937년은 만주사변(1931년)에 이어 일본군부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 2013. 6. 1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4) - 강점제3시기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태평양 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던 미군 B-25 경폭격기입니다. 미군의 공습에 당황한 조선총독부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2013. 6. 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3) - 강점제3시기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사립 창신학교의 1930년대 사진 몇 장 소개합니다. 『창신학교 100년사』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사진들은 폐교되기 전, 창신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장면입니다. 당시 우리 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소개해봅니다. 어떻습니까? 불과 80년 전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 모습이. 2013. 5.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2) - 강점제3시기 일본제국주의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년)에 이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 1941년, 조선총독부는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에 결핵전문병원을 세웠습니다. 마산 가포지역에 있는 현 국립마산결핵병원의 전신입니다. 시작은 상이군인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변화를 거듭해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 되었습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지역은 한 많은 땅입니다. 110여 년 전, 한반도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며 ‘지바무라(千葉村)’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업이민의 전진기지가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포는 20세기 초입에 강대국의 발톱에.. 2013. 5.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1) - 강점제3시기 1940년 2월에 創氏改名이 실시됩니다. 따라서 토지소유주의 이름만 보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이 글에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때 확인한 이름 중 대부분의 한국인은 개명이 되지 않았지만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이름의 형태을 보아 국적을 판단하였고 그 다음은 한국인이 개명을 하여 실제로 사용했던 사례, 그리고 일본인들이 보통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이들을 한국인이라고 자의로 판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니 약간 틀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표는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의 원마산 토지에 관한 비교표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 2013. 5. 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0) - 강점제3시기 1910년대 중반에 대규모 매립을 경험한 원마산 해안은 25여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다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다시 동성동 해안 일대의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그림 중 앞의 것이 1930년, 뒤의 것이 1945년 그림입니다. 1910년대 박간(迫間)의 매립 때 매립되지 않고 남아있던 동굴강이 1927년에 현재 대신증권에서 어시장으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다가 1935년 마산부가 행한 매립 때 전면적으로 매립되었습니다. 동굴강은 현재 어시장에 있는 이른바「너른 마당」의 북측 인접대지입니다. 「너른 마당」은 마산의 어시장 내에 있는 지명입니다. 일제 때 도로개설과정에서 각 도로가 집중함으로써 넓어진 곳인데 넓은 곳이라 하여 .. 2013. 5.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9) - 강점제3시기 먼저 1945년 원마산 상황과 193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 보다시피 1930년부터 1945년까지에 원마산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정리한 번호는 위 1945년 그림에 표기되어있는 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1935년에 지금의 신포동 일대 매립으로 원마산과 신마산이 지형적으로 하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② 같은 해 기선권형망수협지소와 그 인근 건어물 시장 주변 매립으로 동성동과 오동동의 경계까지의 해안이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③ 1937년에는 수성동, 즉 시민외과 앞 도로가 부림시장과 이어져 신포동 매립지와 연결되었습니다. ④ 같은 해 현 오동동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⑤ 같은 해 ④의 도로가 새로 매립된 지역의 도로망과.. 2013. 4.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 2013. 4. 22.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7) - 강점제3시기 일제강점기 마산만 매립 관련 글은 지난 번까지였습니다. 개항기 9회, 강점 제1시기 2회, 강점 제2시기 3회, 강점 제3시기 15회로 총 29회였습니다. 하지만 개항기 매립 중 5회는 계획으로만 끝났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된 매립 횟수는 총 24회였습니다. 매립 면적은 모두 325,000여 평이었습니다. 매립 주체를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조선총독부․마산부․기업․개인 혹은 공동매립과 단독매립 등이 있었으며, 1회 매립 면적도 최소 100여 평에서 최대 10만 평 가까운 면적까지 다양하였고 일거에 수만 평의 매립을 했는가 하면 한 사람이 세 번에 걸쳐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매립의 목적도 다양했습니다. 항만건설을 비롯해서 농지로 사용하기 위한 매립이 있었는가하면 군용지 혹은 철도용지를 목적으로 매립한 것도 있.. 2013. 4.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6) - 강점제3시기 중앙부두 건설공사도 제1부두와 같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의 삼택조(三宅組)에 맡겨 시공하여 제1부두와 같은 날인 1939년 5월 19일 준공하였습니다. 총 25,475평 규모로서 총길이 1,080m의 물양장도 갖추었습니다. 현재 이 중앙부두에는 연안여객터미널․마산지방항만청․모래부두․쌍용양회 시멘트 사일로․세관․검역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현대아이파크 앞에 합동청사가 준공되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은 곧 이전할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하고 나면 이 일대를 근래에 조성한 서항부두와 함께 해양친수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마산 해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계획이므로 시민들 기대가 높습니다. 시멘트 사일로도 철거한다고 하는데 여수엑스포 때처럼 재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설.. 2013. 4.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5) - 강점제3시기 -부두의 건설- 부두 역시 매립으로 건설되었지만 그 목적이 항만건설이라는 점에서 일반 매립과 구분하여 다룹니다. 일제강점기 마산에는 부두를 건설하기 위한 네 번의 매립이 있었습니다. 모두 강점 제3시기(1930년 이후)에 이루어 졌으며 조선총독부 혹은 마산부가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 및 권력 체제로 보아 마산부는 명의만 제공했을 뿐, 모두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급속히 대규모로 시행된 이 항만공사는 마산을 상업무역항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일본의 침략전쟁을 돕는 병참기지로의 역할 수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로 이어지는 일제의 전쟁 광란에서 .. 2013. 4. 1. 가포신항 준설 말고 해양신도시도 중지해야 이미 오래 전부터 예측되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마산의 가포신항 문제를 두고 하는 이야깁니다. 양심적인 학자와 전문가, 시민단체에서 가포신항의 경제성 문제는 일찍부터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업자와 국토해양부 관료 그리고 옛 마산시의 행정을 책임졌던 분들이 아무 문제가 없다며 뭉개고 넘어갔던 일입니다. 토론회, 간담회 수도 없이 많이 했습니다. 기자회견, 성명서 말할 것도 없고 시청, 국회에 까지 적잖게 뛰어 다녔습니다, 지난 십수년,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를 막거나 변경시키기 위해 참 많이도 다녔고 몇해 전에는 해양신도시조정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포신항은 아래 사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예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한심합니다. 이 일 추진했던 사람.. 2013. 3. 2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4) - 강점제3시기 “나카무라 되었다?” 마산의 명승지 월포해수욕장이 매립된 이후 근위빈 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해운동 일대(전 마산화력발전소 자리) 해변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해수욕장이 1944년 12월 3일자로 일본인 종촌번부(中村繁夫)에 의해 매립되었습니다. 지금의 마산시외버스터미널 남부주차장을 포함한 해운프라자, 뎃츠빌딩까지의 넓은 지역이며 시기적으로는 일제기 마산의 마지막 매립이었습니다. 면적은 12,254평이었으며 매립 후 해안은 석축으로 호안하였습니다. 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매립지는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매립된 땅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했고, 해방 당시에는 공터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매립공사에 투자한 금액을 회수할 수가 없었고 매립을 한 나카무라(中村)는 졸지에.. 2013. 3.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3) - 강점제3시기 1940년부터 1942년 9월 5일까지 부산 토건업체인 죽본조(竹本組)의 사주였던 竹本熊次(부산부 수정동 116번지 거주)가 시행된 매립공사입니다. 원마산(마산포) 매축지 동쪽 해변일대로서 마산시 수협이 있던 오동동 251-3을 비롯하여 동일제빙․동양공업․신기사 등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복어거리와 탑마트 그리고 웨딩그랜덤 건물이 있는 일대입니다. 총 11,860여 평이었으며 이중 대지로 사용한 면적이 8,885평, 도로는 2,539평, 하치장이 436평이었습니다. 이 외에 물양장이 254평 있었고 방파제 153m도 함께 시공했습니다. 다음 그림은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매립준공인가관계서류」에 첨부된 본 매립공사의 설계도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이 매립지의 위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산포.. 2013. 3.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2) - 강점제3시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점 말기에 시행된 네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매립지 모두 공장부지로 사용한 사례입니다. 지금은 경남대 앞 상업용지로 도시 한복판인 이 땅들이 불과 7-80년 전에는 바다였으니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1938년 1월 28일 창포동 3가 5-12 전 심건(心建)조선소 자리 594평을 앞의 국전암시(菊田岩市)가 자영 국전(菊田)조선소 용지로 매축 준공하였습니다. 총 세 번에 걸쳐 매립을 한 국전암시(菊田岩市)는 1909년에 마산으로 이주해 와서 국전(菊田)조선소를 경영했던 일본인입니다. 위치는 현 경민 아파트 자리로 그림의 A입니다 1940년 2월 15일 창포동 3가 5-14번지인 전 심건조선소(心建造船所) 건너편 주택지 437평을 교본육삼랑(橋本六三郞)이 매립하였습니다. 위치는 역시 경민 아.. 2013. 3. 11. 가슴에 들어온 진실 『순이 삼촌』 (제주도에서는 촌수가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 부릅니다) 마산YMCA 회원들과 지난 2월1일부터 4일까지 제주도 여행다녀왔습니다. 이름하여 힐링투어. 고등학교 2학년 때, 하얀 이름표가 달린 새까만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왔던 첫 경험 후 지금까지 족히 수십 번은 드나들었던 섬입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특별했습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제주도의 역사와 자연을 온 몸으로 느끼고 접했기 때문입니다. 용눈이 오름과 동백동산습지보호구역, 눈 속의 한라산,,, 다시 본 제주도는 곳곳에서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울림을 받은 곳은 너븐숭이4.3기념관과 옴팡 밭 한복판에서였습니다. 특히 옴팡 밭 한복판에서 쩌릿하게 울려왔던 깊은 전율은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 .. 2013. 3.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1) - 강점제3시기 1920년대 중반까지 마산의 도시구조는 한국인들이 모인 원마산과 일본인들이 거주한 신마산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두 지역을 연결해야할 중앙지역은 지형적으로도 잘록한 병목형이었을 뿐 아니라 철도용지로 묶여 있기까지 해서 도시발전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철도용지가 마산부에 불하되어 시가지 형성이 가능해지자 마산세무서․마산부청․경성전기 마산지점․도립마산병원․지방법원 지원․신문사 등 관공서나 공공시설의 건물이 세워지거나 또는 건축예정부지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른바 중앙마산이 공공업무지역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한 겁니다. 때를 맞춰 비슷한 시기에 조선회사령도 철폐되자 일본인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마산의 중앙부 해변에 매축을 계획하게 되어 본 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위치는 현 대우백화점, 어시장, 삼익아파트, 센트럴.. 2013. 3. 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0) - 강점제3시기 1935년 2월 19일에 국민은행 마산지점 앞 간선도로 일대 2,145평이 매립 준공되었습니다. 그 중 대지는 1,043평이었고 그 외는 도로 및 하수구 등이었습니다. 매립의 목적은 어시장부지와 택지 조성이었습니다. 위성사진에서 본 위치입니다. 이 매립은 1927년 마산부가 시행한「남성동 30번지 동굴강 일부 매립」과 함께 마산부 직영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래 도면이 매립설계도입니다. 매립설계도(정부기록보존소,「공유수면매립방파제축조공사서」,문서번호87-1907,필름번호87-1291)를 자세히 보면 이 매립은 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네 곳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7년에 시행된 동굴강 107평 매립(2012/04/2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06) - 강점제2시기.. 2013. 2. 25. 한달반이면 내집을 '뚝딱' 지을수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나의 집'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싶습니다. 이는 이농을 통해, '도시로,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던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세대에서 그간의 도시생활에 대한 환멸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최근들어, 부쩍 농촌지역에 새로이 들어서는 새집들로 오늘날의 전원경관이 많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별장(Second House)으로 터와 집을 마련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귀촌(귀농)을 결정한 용기(?)있는 분들의 과감한 이주도 있습니다. 또 한 부류가 더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는 없으나 어쨋건 주말을 이용해서라도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은 부류입니다. 이러한 수요가 있으나, 당연히 그 시장을 파고든 주택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국도변에 '이동식 .. 2013. 2. 20.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4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