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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2011. 7. 11.
과거로의 여행 - 소주 산당 역사문화구역 상해,소주,항주 도시건축 답사기-4 소주 산당(山塘 / SHANTANG STREET) 일찍이 마크로폴로가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칭한 물의 도시 소주. 당시 수로를 누볐을 수많은 배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역사문화구역으로 지정하여 과거의 흔적을 복원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산당지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소주 검찰관으로 있을 때 수로를 파고 길을 닦아 수륙 양호를 동시에 개통하여 호구(虎丘)와 고성을 한데 이어놓았는데 수로는 바로 산당하(山塘河)이고 육로는 바로 산당가(山塘街)라고 합니다. 소주의 명물거리인 산당거리주택들은 모두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사찰과 패방, 회관 같은 옛 거리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검은 기와들과 하얀벽은 바둑판처럼 서로 어울려 낡았지만 독특한 풍광를 자아냅니다. 수로주.. 2011. 7. 8.
김은숙의 추억 코스모스처럼 가냘프면서도 강철처럼 강했던 여인 김은숙이 지난 5월 24일 아침, 쉰 셋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딸에게 “사랑해”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합니다. 김은숙,,, 1982년 암흑 같은 세상을 뚫고 부산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러 광주항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여인입니다. 스물 넷 앳된 그녀가 부산미국문화원의 경비를 뚫고 들어가 플라스틱통에 든 인화물질을 복도에 붓고 공범 문부식이 불을 당겨 발발한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그때까지 아름답게만 포장되어 있던 미국의 실체를 만천하에 폭로함으로써 '세계 모든 나라가 반미를 해도,,,'라고 자신했던 한국에서마저 반미 운동을 일게 한 우리 현대사의 대전환점이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만난 건 1988년이었습니다. 그녀가 부미방사건으로 5년 8개월간의 수형생.. 2011. 7.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 2011. 7. 4.
품격있는 상업시설 소주 '타임스퀘어' 상해,소주,항주 도시건축 답사기-3 소주 시대광장(時代廣場 / TIMES SQUARE) 소주시 강소성 공업원구에 위치한 시대광장은 백화점, 요식, 위락 센터와 오피스텔을 포함한 대형 상업시설로 총 건축연면적이 15만평에 이릅니다. 전체적인 모습이 창원의 시티세븐과 유사하지만 우리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드문 슈퍼블럭개발 기법을 채택하여 광범위하고 다양한 블럭내를 보행자가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금계호와도 연결되는 수로가 블럭 중앙을 관통하며 멋진 풍광을 제공하고, 내부 통로 천정에 길이 600여 미터에 이르는 LED스크린을 설치하여 다양한 영상으로 보행자의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 건물 및 내부가로 ● 옥외시설물 ● 야간경관 2011. 7. 1.
창원시만의 버스색상을 만든다는데... 창원시가 추진하고 있는 시내버스 색상디자인 변경 안입니다. 시내버스 디자인은 도시경관의 중요한 요소라 공론화 시킬 필요가 있다싶어 소개합니다. 현재 버스디자인의 문제는 불필요한 정보가 과도하게 많고, 너무 크고, 광고도 자극적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용하는 색의 종류가 많아 주조색, 보조색, 강조색의 개념도 없습니다. 타 도시 사례를 소개합니다. 서울시는 빨강, 파랑, 초록으로 구분하였으며, 광역간선, 지선, 순환노선으로 구분됩니다. 부산의 경우는 이원화시켜 일반버스와 급행버스로 구분됩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답게 파랑색과 흰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급행의 경우 빨강색이구요. 대구의 경우도 빨강과 파랑색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순환노선의 경우 색상을 다르게 적용한 것이 통일감이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 2011. 6. 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의 시가(市街)는 마산포라 불렀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도시 신마산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마산포는 우천이 아니면 어느 때라도 사람들로 붐볐으며 특히 5․10일 장에는 전(全) 지역이 혼잡할 만큼 사람의 왕래와 상거래가 많았습니다. 산업은 상업이 주(主)였고 다음은 어업이었으며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였습니다. 1911년이 되어서야 종래 재래식 디딜방아뿐이었던 원마산에 일본인 하목철삼(夏目哲三)이 발동기를 이용하는 정미소를 설립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한와사(瓦斯, 가스)전기주식회사 마산지점이 1911년 3월 16일에 설치 허가되어 중앙동 전 마산시청자리에 발전소를 건립, 같은 해 5월 23일 최초로 전기를 송출한 것을 비롯하여 도시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앞의 하목철.. 2011. 6. 27.
경관조명의 백미 소주 과기문화예술중심 상해,소주,항주 도시건축 답사기-2 소주 과기문화예술중심(Science and Cultural Arts Center) 소주시의 금계호를 끼고 지어진 과기문화예술중심은 창원의 성산아트홀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건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센터라고 부르는 곳을 중국에서는 중심(中心)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타원형의 단순한 형태이지만 호수와 어루러져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2011. 6. 24.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초,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직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직업을 보면 그들의 산업도 알 수 있는 것, 오늘은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작년 10월 11일자 제27회 글(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에서 일본인 이주 초기인 1902년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을 포스팅 한바 있습니다. 모두 46종류였으며 겸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8년의 세월이 흐른 1910년경에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업종도 169종으로 다양해 졌을 뿐만 아니라 종사자도 1,82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시작된 이주로 일본인의 숫자도 많아졌지만 식민지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던 시대상황.. 2011. 6. 20.
중국 상해,소주,항주 답사기 연재합니다. 지난 6월 2일부터 6일까지 4박5일간 중국 상해, 소주, 항주지역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창원대학교 도시건축 설계연구실 소속 교수님과 대학원생들이 함께 일반 관광지는 되도록 배제하고, 해당 지역의 도시와 건축물을 위주로 탐방하였습니다. 단체답사이고 일정이 짧아 많은 곳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역사도시의 흔적과 신개발지역의 발전상을 짧은 소회와 곁들여 전해드리겠습니다. 상해,소주,항주 도시건축 답사기-1 전통이 살아숨쉬는 도심상업지역 소주 관전가(觀前街) 상해 푸동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처음 들린곳은 소주 관전가 입니다. 관전가는 소주도심을 동서로 가로질러 800여 미터에 달하는 거리에 각종 상점, 음식점, 보석가게들이 즐비한 상업지역으로 보행전용거리 입니다. 서울 명동이나 마산 창동거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 2011. 6. 17.
대구 원도심 '근대로(近代路)의 여행' 지난달 말 경남건축가협회 회원들과 대구의 원도심일대를 투어하고 왔습니다. 마산지역의 원도심은 거의 아시직전에 도시재생이라는 처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대구의 원도심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활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결과는 대구에서 동성로의 가로경관디자인과 함께, 근대건축물과 근대기의 골목문화를 지속적으로 가꾸고 관리해온 결과일 것입니다. '근대路의 여행'은 대구시에서 작명한 골목문화 탐방로를 말합니다. 설명에 앞서 대구 원도심에 대한 간략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 대구읍성 : 대구의 원도심은 원래 대구읍성터를 경계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읍성이 철거하게된 배경은 역시 일제강점기때에 경부선이 북문쪽으로 개통되자 (1904년) 연이어 1908년에 기존의 성곽을 철거하.. 2011. 6.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마산에 전국 최초로 시외버스가 다녔다면 믿어지십니까? 햇수로 100년 전인 1912년 9월 마산-진주간을 달리는 버스가 생겼습니다. 한달 전인 8월에 대구-경주-포항간 버스가 생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마산-진주간 버스가 1911년 12월에 최초로 영업인가를 받았으니 최초라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자동차역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1911년 진주에 살았던 ‘에가와(繪川)’라는 일본인이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간 버스영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 최초의 버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일신보에 의하면 마산-진주와 진주-삼천포간 버스를 1911년 12월에 인가를 받고 다음 해 9월 마산-진주부터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대판에 자동차를 주문했는데 한 대만 도착해 마산-진주를 먼저 운행했.. 2011. 6. 13.
주차에도 위아래가 있다? 창원대학교 공과대학 54호관 건물에 인접한 교직원 전용주차장이 있습니다. 근처에 주차할곳이 없는것도 아닌데 왜 이런 표지판을 세웠나 맘에 걸리던 차에, 얼마전 부터 교직원주차증이 없는 차량은 단속하겠다는 안내가 붙었고, 실제로 앞유리에 경고장을 붙이고 있습니다. 건물에서 가까운 가장 좋은 자리에 교직원만 주차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새삼스럽게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를 거론하기 전에 교직원의 특권의식이 불편합니다. 교직원은 학교에서 계속 근무하고, 학생은 졸업을 하면 떠나기 때문에? '군사부일체'의 유교사상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학생이 공부나 열심히 하지 무슨차를 끌고다녀? 어떤 이유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한 교직원전용주차장을 설명하기에 궁색해 보입니다. 창원대는 국립대학이기 때문에 국가가.. 2011. 6. 10.
끊어진 다리 얼마 전, 압록강 하류에 있는 중국 단동에 다녀왔습니다. 중국 요령성 단동은 북한의 평안복도 신의주와 철교로 이어지는 곳, 북한과 가장 가까운 중국 땅입니다. 한반도와 중국 땅을 오가기 좋은 곳이라 예부터 조공로(租貢路)로 사용된 지역이기도 합니다. 육이오 때 미공군 폭격으로 부서져 있는 철교며, 이성계가 회군했던 위화도며,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의 도도한 자부심이 넘치는 중국정부의 기념물들과 여진족을 막기 위한 명(明)의 장성(長城, 虎山山城)이며, 고금을 넘나드는 시대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이곳이 소용돌이쳤던 역사의 한복판이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늦은 저녁에 도착하여 압록강 철교의 밤풍경부터 보았습니다. 6.25 때 잘려나간 철교가 어두운 압록강 위에 걸쳐 있었습니다. 일한병합 직후인 1911년 .. 2011. 6. 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당시 마산전경사진입니다. 현 대우백화점과 삼익아파트 일대에 매립을 하기 전이라 해안선이 환주산 밑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고, 신마산과 마산포 사이의 옛 마산시청부터 몽고정까지는 전부 논밭입니다. 왼쪽에 문신미술관이 있는 환주산을 시작으로 멀리 용마산과 팔용산 자락이 차례로 보입니다. 환주산과 용마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 마산포이고, 산 능선 중 잘룩 들어간 곳이 현재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 전이라 마산만이 꽤 넓습니다. 1911년 새해벽두부터 개항지였던 마산항이 폐쇄되긴 했지만, 식민지의 통치와 수탈에 필요한 선박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라는 명목으로 선박의 출입항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수탈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 선박은 개항기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통계상으로는 오히려 .. 2011. 6. 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일제강점기 마산의 인구 통계는 마산부가 자체적으로 간행한 몇몇 자료에 남아 있는 기록과 국세조사 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조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친 인구변화의 추이를 알아보기 위한 자료로서는 부적당합니다. 그러나 병합 이후에 매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해서 출판한『조선총독부 통계연보』는 조사방법이나 조사시기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여기서는 이 자료를 이용해 마산의 인구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대 마산의 인구변화추이입니다. 연도 한국인 일본인 외국인 합계 일인 비율(%) 1910년 10,664 5,941 52 16,657 35.7 1911년 9,847 6,199 46 16,092 38.5 1912년 5,672 1913년 9,494 5,262 41 14,.. 2011. 5. 30.
'창원'하면 떠오르는 도시이미지는? 얼마전 인터넷을 검색하던 후배가 재밌는 그림을 발견했다며 아래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세계각국의 도시들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엠블럼으로 만든것이었다. 어느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공감할수 있을 정도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으나, 마지막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보고 참 묘한 생각이 들었다. 기막히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국가의 이미지가 이래서야 되겠냐는 탄식이 뒤따랐다. 이미지의 출처를 찾아보려고 애썼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했고, 다른 이미지는 모두 도시명인데 우리만 국가로 표기된점을 보아 한국의 이미지는 국내 네티즌의 자폭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아파트숲과 교회십자가... 안타깝지만 부정할수 없는 우리 도시의 이미지이다. 홍콩의 건축거장 '아론 탄'이 지난.. 2011. 5. 27.
수요일 밤은 아름다운 공연과 함께... 언제부터 였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이 맘때가 되면 수요일 밤마다 성산아트홀 어울마당에서 야외공연이 열립니다. 회사와 집이 지척이라 가끔 가족과 함께 산책나와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즐기곤 합니다. 오케스트라 연주 부터 국악, 무용 등 장르도 다양하고 꽤 수준있는 공연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무대뒤 도로의 차량들과 행인들로 인해 좀 산만한 면이 없진 않지만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공연의 딱딱함을 풀어주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는 창원시립무용단의 "5월의 춤나들이"라는 작품을 보았는데요. 한시간 가량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휴대전화로 촬영해 화질은 별로지만 공연의 감흥은 어느정도 느낄 수 있을겁니다. 흔히 서울에 비해 지역에서 문화, 예술을 접할 기회가 드물다고 푸념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2011. 5.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1910년대의 마산은 1911년 1월 1일을 기해 진해군항을 일제의 해군요새로 보호한다는 구실로 마산항을 폐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합방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발표한「일한병합에 관한 선언」제4호에서 「종래의 개항장은 마산포를 제외하고는 종전대로 이를 개항으로 하며 다시 신의주도 개항에 추가하여 내외선박의 출입 및 이에 의한 화물의 수출입을 허한다」함으로써 마산의 개항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마산개항의 역사는 11년 8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합방이후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남아있던 각국공동조계지도 해제되고(1914. 3. 31) 마산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등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개항이 종료되어 마산항이 대외적으로는 폐쇄되었으나 일제가 필요로 하는 외.. 2011. 5. 23.
마무리 하며 : (10) 외국의 도시분위기는 왜 다른가? - 맨홀뚜껑 / 공공디자인 공공시설물중에서 "공공디자인의 영역은 이런부분까지 해당합니다~"라고 설명할때 가장 하찮은 공공시설물로서 제시되는 것이 맨홀뚜껑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디자인맨홀뚜껑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우선 현재의 우리 모습을 먼저 살펴보아야겠지요. 주철로 생상되는 양산품들입니다. 튼튼하기로서야... 하지만 잘 관리되지 않아 훼손된 모습은 아래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디자인의 개념상 반복패턴으로 세련되지 못한것은 아닙니다만, 바뀐모습을 보이기엔, 또는 공공미술적인 요소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란 것입니다. 그나마 컬러 맨홀뚜껑으로 나온 것이 다음과 같으며, 다음 통영시의 맨홀뚜껑도 그에 해당합니다. 검색내용중에서 눈에 띄는 사진이 한잔 있었습니다. 경북 디자인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도자로 만든 맨홀뚜껑 .. 2011. 5. 20.
신라 古都 경주에 다녀왔습니다. 경주하면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통해 한번씩 다녀왔던 곳이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보문단지 주변 휴양숙소에 들르는 정도일 뿐, 불국사에는 갈일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작정을 하고 갔답니다. 초등학교 때, 약 3-40년 전에 갔었던 기억의 흔적이라도 찾을겸 해서 선후배 동문 건축사들과 지난 4월 말에 당일치기로 갔다 왔습니다. ● 불국사 -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751년)때 지어진사찰이었느나, 조선 선조(1593년)때 왜구의 의해 건물은 대부분 불타버리고, 일부 건물만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73년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춘 사찰입니다. - 불국사 정문 모습입니다. 원래 사찰 배치에 의해 지어진 것은 아니고 최근에 관리상 만들어진 정문 같습니다. 보통 절에 가면 .. 2011. 5. 1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오늘부터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년간을 다루겠습니다. '일제강점 제1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1910년 8월 22일, 우리나라는 소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강제 조인하고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약은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이었던 우리나라의 이름은「한국의 국호를 앞으로는 조선으로 칭함」이라는 칙령 제318호에 의해 다시 ‘조선’이라 불렸고 통치권은 조선총독부가 가졌습니다. 이 조약문이 실효를 발한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일한병합축가'와 '.. 2011. 5. 16.
(9) 외국의 도시분위기는 왜 다른가? - 볼라드 / 공공디자인 누구나 '개구리 주차'를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도로교통법상의 주차개념이 아니면서 범용화된 주차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불법이지요.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범칙금이 승합차의 경우 5만원, 승용차는 4만원이나 됩니다. 우리 도시의 일상 도로를 다녀보면, 일반적인 이면도로 왕복4차선의 경우, 대부분이 각편도 1차선씩은 불법 주차가 만연합니다. 저 또한 그런 경험을 셀수없이 많이 하기도 하였습니다. 개인의 편의가 우선이 되게 되므로 아무리 '대중교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외치더라도 대중교통이 더 불편한것을 어쩌겠습니까. 더욱이 보도에서 자동차가 사람 다니기 거북할 정도로 불쑥 올라와 있을땐 정말 짜증나기까지 하고, 그자리에 없는 운전자를 욕해대기도 합니다. 교통문제로 화두가 가고 있는것 같습니다만, 편도.. 2011. 5. 13.
그래, 나도 역사가 있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야 재미있는 영화 한 편 보았습니다. ‘써니’라는 코믹인생드라마입니다. 24년 전에 지은 집을 고치느라 요즈음 제가 좀 부산합니다만 시간을 내어 지난 일요일 아내와 함께 보았습니다. 시나리오가 괜찮았습니다. 40대 초반 여성들의 여고시절추억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이나 상처 등의 진부하거나 진지한 이야기가 아니라 ‘써니’라는 여고생서클 출신들의 쾌활한 이야기였습니다. ‘고교생서클’하면 영화 ‘친구’가 떠올라 으레 남학생들의 폭력서클 이야기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써니’는 여학생들 이야기라 조금 색달랐습니다. 성공하였지만 사람사는 재미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주인공 나미, 만년 꼴지 보험설계사 장미, 싸구려 술집 접대부 복희,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방문교사 금옥, 돈은 많지만 바람피우.. 2011. 5.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7) - 개항이후 개항 직후 시작된 이 도시의 생성과 변화를 31회에 걸친 포스팅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던졌어야할 질문을 뒤늦게 던져봅니다. 그들은 왜 '창원군 외서면 월영리와 신월리 해안'을 개항지로 삼았을까요? 근대 마산의 시작은 개항이었고 개항지는 마산포 남쪽 2㎞지점의 월영리와 신월리 일대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조계지였던 이곳은 ‘신마산’이라 불렀고 그들이 부른 ‘신마산’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항지로 선택되었던 월영리와 신월리,,,,, 그곳은 마산도시의 최남단으로 지형상 말단부였습니다. 동쪽은 합포만, 서쪽은 무학산이 막아 북쪽 마산포 쪽으로만 시역의 확장이 가능했던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조건이 이러했슴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조계지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① 외부와의 연결은 물론 당시에 문물교류 루.. 2011. 5.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 2011. 5. 2.
(8) 외국의 도시분위기는 왜 다른가? - 쉘터 / 공공디자인 봄볕에 며느리보내고, 가을볕에 딸보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봄에 한해농사의 일이 힘들어 며느리를 시키고, 추수는 힘이들어도 수확에 따른 성취감을 맛볼수 있기때문에 딸을 보낸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또한, 봄과 가을의 기온은 비슷한것 같으나봄 하늘의 오존층이 얇기때문에 자외선에 더욱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찬란한 봄날'의 햇볕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수록 도시공공시설물에서 파고라가 더욱 필요합니다.물론 무수히 많이만 세워지는것이 능사는 아니겠지만,일률화된 우리 도시의 파고라 모습을 보면서외국의 특색있는 파고라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독일 만하임 ** 독일 슈투트가르트 **마카오 ** 스위스 제네바 ** 스페인 마드리드 ** 스페인 빌바오 ** 스페인 세비야 ** 스페인 코르도.. 2011. 4. 29.
유적지, 다 막아놓으면 관리는 편하겠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내세울 만한 유적이 별로 없습니다. 일제의 지배와, 전쟁, 산업화등 격변기를 겪으면서 먹고사는 문제외에는 관심을 둘만한 여력이 없었던 탓이겠지요. 하지만 남아있는 유적의 관리가 시민들의 접근을 막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다 보니, 지역의 역사를 알기위해 애써 찾아가도 겉모습만 보고 돌아올수 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본디 집이나 물건은 사람의 온기를 느껴야만 제구실을 하고 오래간다고 했습니다. 관리의 편의성만 생각하여 꽁꽁 막아놓는다고 해서 유적들이 과연 온전할까요? 물론 철없는 사람들로 인한 훼손이 염려되기는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공공사업등의 방식으로 낮시간 만이라도 관리하는 분이 있으면 어떨까요? 탐방객들에게 유적에 대한 안내도 하고, 청소 등 관리도 한다면 훨씬 의미가 있을.. 2011. 4.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1910년 경 마산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어디일까요? 복원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를 각각 그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결과를 그림으로 나타내 당시 도시상황을 확인하였습니다. 토지과세가격과 비교하여 토지등급으로 지가(地價)를 분류해도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남성동(당시 元町) 1번지의 사정토지대장입니다. 노란색 원 안에 등급이라는 표기가 되어있는데 등급이 몇 차례 바뀐 흔적이 있습니다. 복원도의 땅 1,157필지는 최저 17등급에서 최고 77등급까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색깔이 짙을수록 비싼 땅, 번화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마산창을 중심으로 서굴강과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남성동 .. 2011. 4. 2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1910년 경, 일본인들은 마산포의 땅을 얼마나 차지했을까? 사실을 알기 위해 복원도에 나타난 모든 땅의 소유관계를 사정토지대장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붉은 색 표기를 한 토지가 당시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지입니다. 한일병합 직후에 한국인들의 오랜 터전이었던 마산포에 일본인들이 이처럼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존의 여러 문헌에서는 '비록 일본인들이 신마산은 차지했으나 주민들의 반일의식 때문에 마산포에는 쉽게 진출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위 도면을 보면 이런 주장들에 의구심이 생깁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반일의식과 달리 마산포 요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 2011.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