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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가(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현 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년(명치43년)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某 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89. 제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 2016. 4.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86. 고춧가루 강도, 87. 제2의 헤스마 86. 고춧가루 강도 확실히 1924년 봄이다. 그때만 해도 구마산(元町, 현 남성동) 우편소에서 직접 집배는 물론 적행낭수송(赤行囊輸送)하던 때다. 오전 7시면 먼동이 트이고 모든 물체를 확연히 볼 수 있는 때다. 7시 몇 분에 구마산의 발차시간에 우편직원(全모라 했다)이 행낭과 우편물을 둘러메고 가는데 당시 상업학교 정문 근처에서 별안간 괴이한 청년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뿌리는 찰나 직원은 쓰러졌다. 세상이 어둡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눈이 따가운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재채기까지 병발(倂發)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을 겪는 중 역으로 가는 승객들에게 구조되었는데 소중한 적행낭(赤行囊)만 없어지고 말았다. 행낭에는 대소액환 송금증이 들어 있었다는 신고를.. 2016. 4.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4. 105인 사건의 후환, 85. 역장의 폭행 84. 105인 사건의 후환 마산원동회사가 발족하기 훨씬 오래전, 초대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북한을 초도 순시할 때의 일이다. 조선인 지사(志士)를 탄압하기 위해 조만식 등 1백 수십 명을 타진하고 사내(寺內)암살 음모라는 모략을 조작했다. 이것을 트집하여 지방에 산재한 열혈지사(熱血志士)까지 마수가 뻗쳐졌던 것이다. 원동회사 사옥 자리에서 학부(대한제국 문교부) 편찬교과서를 판매하던 김지관(서울 출신)에게 뜻하지 않던 한 장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발행국 소인은 불명한 것이나 내용을 약기(略記)하면 ‘3년 전에 우리의 원수이며 한국민의 대적인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죽였으니 이번엔 사내(寺內)라는 흉적을 처치해야 안되겠냐? 이 글월을 받는 즉시 때를 잃지 말고 거사준비를 하라!’ 이 글을 본 .. 2016. 4.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83. 엽총 정사 83. 엽총 정사(情死) 1923년(대정12) 초봄 무학산 봉우리에 아지랑이가 서리고 시냇가 버들가지엔 강아지가 겨우 필락 말락하는 약력 3월 중순경, 시내 장군교 교반(橋畔)으로 나이 60이 넘은 일본 노인 한 사람이 다비(일본 버선) 발로 헐레벌떡 달리다 역시 일본인 순사에게 검문을 당하고 있는데, 다리에서 서녘 윗길 30미터 되는 노상에서 총소리가 터져나왔다. 도망치던 노인은 일본 사족(士族)이요, 법정에서 입회 검사와 싸움 잘하는 변호사 장자빈(莊子斌) 노인이었다. 장자(莊子) 변호사집 건너편에 서기로 있는 관원(管原)이 살고 있었다. 이 자는 대구 검사국에서 사기 사건인가 공갈죄로 형을 받아 이 자와 동서(同棲)생활을 하던 조선인 여자가 이 자의 대리 복역을 하고 있었다. 진범은 그 자인 것을 .. 2016. 4. 4.
김형윤의 <마산야화> - 82. 총각회 사건 82. 총각회 사건 시내 중성동에 자리 잡은 목조는 1921년 경에 진동읍내 김상범이란 청년지주가 장만한 주택건물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리 한 번 한 일이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주인 뿐이다. 주택으로 병원으로 여관으로 변하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외면으로는 평탄하게 지낸 듯 하지마는 처음 주인 김 씨 때 벌써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위 총각회 사건이다. 내용인 즉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중산계급이면 으레 소실을 두는 것이 공공연한 통례이니 여기에 김 씨가 빠질 수 없다. 시내 모 사립여학교를 중퇴한 묘령에다 미모인 조(曺)섭이란 처녀가 있었다. 여학교를 중퇴하였다 하면 그 가정 형편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18,9세의 묘령.. 2016. 3.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0, 어속령의 참화, 81. 두 청년의 순정 80. 어속령(魚束嶺)의 참화 마산 시내에 자동차를 운영한 곳은 대정 2년(1913) 마산역전 상반여관(常盤旅館)인 것 같다. 마산에 소위 신작로가 생기고, 함안, 진주로 통하는 길은 1908년(지금 신마산 쪽에서 시청 앞 도로는 1914년 경인 듯)이다. 이의 증거로 마산 창신학교 앞 회원교에 융희 2년 건립이란 표석이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 1908년인바 해방 후에 반가지(半可知)의 애국자들의 손으로 삭제되고 단기연호로 박혀버린 것이다. 각설 상반여관이 소유한 차량은 그때는 ‘포드’ 포장차(布裝車) 7인승이며 이것으로 매일 혹은 격일제로 진주까지 내왕하던 한산한 시절이었다. 1917년 가을경이다. 지방신문인 남선일보사 주최로 미기(美妓) 투표의 승자인 배학희 양은 애인의 본댁으로 가는 도중 군북을.. 2016. 3. 21.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오래 동안 지역을 떠나있었던 분이라 2년 전 취임 때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임 후 보여준 모습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특히 도시철도문제의 간명한 해결과 주남저수지 보전에 대한 입장은 매우 신선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런 기대감으로 씁니다. 인공 섬 해양신도시가 처음 계획된 것은 어언 15여 년 전입니다.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은 저 섬에다 고층아파트를 지을 계획으로 시민들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도시 사정을 잘 아는 다수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매립은 하되 아파트는 짓지 않겠노라 약속했던 겁니다. 이 약속은 통합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박완수 시장도 아파트와 상가가 아니라 공익을 위한 용지로 개발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2016. 3.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년(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境)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등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 2016. 3.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 한자가 많아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옮긴이) 개항 이래 일본인들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 소유권의 약탈과 아울러 광산권까지도 침탈해 가게 되었다. 마산에 이웃한 창원군 북면에 있는 구룡산 아래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은 20년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것이었다. 이를 탐낸 일본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라는 자가 전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과 결탁하여 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1901년 6월부터 기계와 재력을 투입하여 약 5년 한(限)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를 탐지한 내장원(內藏院)은 1902년 2월 철광(撤礦)을 명령하였다.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은 투자를 구실로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감리보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접광.. 2016. 3.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76. 부자는 오월동주 76. 부자(父子)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에 오월동주(吳越同舟)란 말이 있다. 오왕 부차(夫差)와 월왕 구천(句踐)은 수구(讎仇)의 사이인데,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좌석을 같이 했을 때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예를 들 수 있는 분이 있으니 위암 장지연 선생과 그의 장남 장재식과의 부자지간이다. 위암은 구한말 을사오조약 체결 당시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필화사건으로 유명한 분이며, 선생의 장남인 재식은 마산부제(馬山府制) 실시와 동시에 조선총독부 판임관에 취임한 사람이다. 선생의 혈육관계를 살펴보면 이남 재철은 웅지를 품고 상해도 갔다가 일찍 타계한 애국청년이며, 삼남 재륜은 유근 선생(1861~1921 / 한국의 언론인 / 장지연,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 2016. 2.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74. 변호사 명록과 대서인, 75, 오촌 변호사 74. 변호사 명록(名錄)과 대서인(代書人) 마산에 법원이 설치됨과 동시에 정착 변호사와 출장 변호사(마산에 연락사무소와 서기만 둔 사람)는 다음과 같다. ○표는 출장 변호사. 정상의리(井上義理), ○굴지(掘池), 이용재, ○김기정(통영), ○박해극, 오촌(奧村), 천기(川崎), 서기홍, 박지영, 중촌(中村), 소출(小出), 장자빈(莊子斌) * 마산 최초의 변호사는 정상의리(井上義理) 법원이 현 장군동(通町 4丁目)으로 이전한 다음 모든 대서인들은 이곳으로 집중한 바 그 당시의 대서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천수 김기수(형제), 길천쾌조(吉川快造), 장도의마(長島義磨), 고교덕조(高橋德助), 미농부 모(美濃部 某), 강인중, 강선중, 선철환, 여병섭, 상야영조(上野榮助), 좌등선구랑(佐藤善九郞), 제.. 2016. 2.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73. 어떤 일인 변호사 73. 어떤 일인(日人) 변호사 장자(莊子) 빈(斌) 노인은 한문학자로서 다분히 야인적 정치 색채를 띤 일종의 장한(壯漢) 타입이다. 일찍 조선 토지조사국에 봉직한 일이 있으나 언제 어떻게 되어서 법조계에 뛰어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오래 우거(寓居)한 곳은 장군동 3가이며 만년의 가족으로 자부(子婦)와 시부(媤父) 단 두 사람이다. 말하자면 형영(形影) 상조(相弔)라는 표현이다. 그는 사족(士族)으로 선대의 무사(武士)집 자제라고 하며 일설에는 일본의 정당인 정우계(政友系)라고도 한다. 당시 망(望) 70년령인데 소장(少壯) 2, 3명 쯤이야 때려 눕힐만한 건강체이고 술도 두주불사하리만큼 호주(好酒)이며 대식(大食)이다. 자기가 맡은 사건이 여의치 못한 판결이 있을 때에는 으레 집에 돌아오던 길.. 2016. 2.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72. 법창야화 72. 법창야화 율산(栗山)검사의 저울질 마산 검사국 검사로서 인격자도 있었지마는 풍각장이 형(型)의 검사도 몇 사람 있었다. 그 중 대표적 인물로 율산(栗山) 검사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동경제국대학 즉 적문(赤門) 출신의 법학사로 전임처가 어딘지는 기억이 안 되지만 성품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광적이었다. 그가 재임 시에 연출한 기상천외의 연극 몇 토막을 소개해 본다. 매월 21일은 관공리(官公吏)의 봉급날이라 평소의 인색하기 한이 없는 율산은 검사의 본때를 보일 양으로, 당시 소도 효(小島 孝)라는 경찰서장을 요정 망월루로 불러놓고 제법 호기 있게 ‘산재(散財)’를 하다 취흥이 무르익자 면도칼 같은 10원권에 코를 풀어 내던지면 서장은 코 묻은 돈을 닦아 율산에게 무릎을 꿇은 채 바쳐 올린다. 이에.. 2016. 2.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71. 변심 여자의 참수사건 71. 변심(變心) 여자의 참수(斬首) 사건 서(序) 통칭 ‘살로매’란 이름이 세계에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지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둘째 작은 ‘야곱’,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매(마가 15장 40절)’로 되어 있다. 독일의 음악가 ‘리히알트 스트라우스’의 악극 살로매의 내용을 약술하면 헬롬 대왕의 생신 축하에 춤을 춘 살로매에게 감격한 헬롬 대왕은 살로매가 원하는 것은 무언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니 살로매는 자기의 불타는 사랑을 거절한 요카난(세례 ‘요한’을 말함)의 목을 베어 달라고 했다. 헬롬 대왕은 즉시 요카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살로매는 피투성이의 요카난의 목에 키스함으로써 실연의 복수는 하였지만 이 꼴을.. 2016. 2.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70. 영미연초의 출현 70. 영미연초(英美煙草)의 출현 1907, 8년 경에 일본서 창설된 영미연초(英美煙草)와 동아연초주식회사는 한국으로 진출. 마산에서 맨 처음으로 선전 판매한 담배는 오본입(五本入) 병정표와 십본입(十本入) 새표, 파이레트(통칭 칼표)와 자전거표. 그 다음으로는 담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차림을 한 선전 부원들은 나팔과 북을 치며 가두 행진을 하면서 담배를 공짜로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기다란 연죽(煙竹)에 엽초(葉草)를 즐기는 때라 생활의 여유있는 사람들은 옥(玉)이나 호박 빨뿌리에다가 금박 장식을 한 은삼조동(銀三鳥銅) 담배통을 즐겼으며, 담배는 한때 이름났던 원산초(元山草)가 아니면 충청도산 엽초에다 소주와 꿀물을 뿜어가지고 이것이 습도나 건조의 중간쯤 해서 곱게 접어 그 위에 무게 있는.. 2016. 1.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년 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 2016. 1.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도시계획에 따라 허물어지고 없어진 시내에 점재(點在)하던 이름난 건축물을 살펴본다. ● 동척(東拓)지점(와가 / 瓦家 - 목조단층) - 오동동 삼각상점에서 동으로 신작로가 남으로써 건물과 정원의 2/3 이상이 철훼(撤毁)되는 동시에 지점도 폐쇄되고 그 자리가 중화요정 봉래관(蓬萊館)이 되었다. ● 명태창고 - 이 건물은 1920년 여름 남한을 휩쓸던 호열자(虎列刺) 때 환자 수용소로 일시 이용한 때도 있었으나 역시 도로 확장에 따라 반 이상이 철훼(撤毁)되고 지금은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 박간(迫間) 창고 - 이곳은 창고와 광장이 있어서 그때는 환등(幻燈)과 활동사진을 공개하였고, 창고는 농구상(農具商), 보덕상회(報德商會)와 서야도기(西野陶器) 창고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 2016. 1.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66. 마금산 온천 67. 행려병자 수용소 66. 마금산 온천 창원군 북면은 멀리 문창군(文昌郡) 관할, 그 다음으로 회산군(檜山郡)으로 개칭하였다가 이조 말엽에 창원부에 속한 곳이다. 여기에 마산 근교의 유명한 온천이 있었는데 이조 초에는 약수온천이라 하여 환자의 왕래가 부절(不絶)함에 따라 여인(旅人)을 수용할 숙소가 없던 그 시절이라 부득이 무료 민박의 폐단이 심한 관계로 지방민들과 상의 끝에 온수구(溫水口)를 매몰하여 버렸다. 이것을 안 엿장수 한 사람이 극히 소규모의 수원(水源)을 발굴하고 엿을 사는 환자에 한하여 목욕과 음복수(飮服水)를 제공해 왔다. 여기에 착안한 마산부 선정(扇町, 현 반월동)에서 치과의 겸 총포화약상을 하던 일본인 여창(與倉) 모가 엿장수에게 대단히 헐값으로 권리를 인수하여 정식으로 수원을 착굴하여, 얼마 안가서 .. 2016. 1. 4.
새해인사 또 새로운 해가 찾아 왔습니다.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뀌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지는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 2016. 1. 1.
김형윤의 <마산야화> - 64. 오보와 똥소동 65. 목장 64. 오보(午報)와 똥소동 지금 마산은 장군천변에 있는 소방서와 남성동 경찰파출소의 두 곳에 오보(싸이렌-오전 4시 통금 해제, 정오 12시, 오후 11시반과 12시에 취오吹嗚) 장치가 되어 있지만 12,3년 전에는 완월 심고(新敎-천주교) 성당의 신부 시계에 의해서 오종(午鐘)을 치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성지교(聖旨校) 이하는 일인주택 1동과 조금 내려와서 오반전(五反田) 양조장(푸른집 / 도립의료원으로 증축하고 있는 전 크리스탈 호텔-옮긴이) 그리고 산전(山田)장유공장(현 몽고장유) 외에는 허허벌판이며, 구마산 입구 주차장 가는 첫 골목에는 장승 한 쌍과 세칭 아래학교(현 성호초교 전신) 뿐이었던 때다. 성당 종소리가 현 구마산 천주교회 근처까지 은은히 들려오므로 동민들은 정오 12시를 알게 된다.. 2015. 12.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62. 금융계의 공황 63. 각 관공서의 한동 62. 금융계의 공황(恐慌) 1927년(소화2년) 전국 금융가를 휩쓸던 모라토리엄(moratorium : 지불유예 또는 지불정지)은 금융가 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일대 공황을 가지고 왔다. 때는 동녕 4월 22일자로부터 대만은행을 제외한 전 일본 영토를 포함한 은행과 금융기관(조선의 금융조합도 동일)에 예치한 금액을 향후 3주일간, 즉 5월 12일가지 5백운 이상은 지불 유예하기로 긴급 칙령 96조로서 공포했던 것이다. 당시 마산 식은(殖銀)지점과 조선은행 출장소 문전에 게시한 공포문은 다음과 같다. 사법(私法)상 금전 채무의 지불 및 수형(手形) 등 권리보존 행위의 기한 연장을 하는 건이 바로 ‘모라토리엄’이라 해 놓고는 1. 국·부·현(國·府·縣) 그 외의 공공단체의 채무지불. 2. 급료 및 임금의 지.. 2015. 12. 21.
한국 100명산이야기 19 : 기가 센 모산재와 황매산 ● 9시 메트로시티 1차 정문에서 출발하여, 10시 반에야 모산재 식당앞에 도착했습니다. 모산재는 황매산 정산에서 가장 원거리에 있는 출발지입니다. 그래서 정상까지 등정하는 코스보다는 황매산 기적길이라는 순회코스가 인기가 많은 곳입니다. 볼거리가 많은 코스입니다. 우리는 경관도 즐기고 정상을 향하려는 두가지 욕심을 부려보았습니다. - 황매산기적길 : 한바퀴 도는데 5키로미터 정도입니다. 정상에 해당하는 모산재를 기점으로 순환하는 코스입니다. 순환코스 내내 절경을 즐길 수 있는 코스입니다. - 입구 철망에 걸린 산행단체 리본들 : 우리 100산 원정대는 이런거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는 마음으로~~~ - 산마루에서 쉬어가며 : 모산재 코스는 대체 암반으로 되어있고 경사도 심해서 시작.. 2015. 12. 17.
김형윤의 <마산야화> - 61. 은행 61. 은행 이곳에 제1착으로 은행이 설치된 것은 일본 굴지의 재벌인 삽택영일계(澁澤榮一系)의 제일은행 출장소. 현재 신마산 진일기계 제작소 건너편에 있는 천주교당(현 월남동 성당-옮긴이) 자리이다. 물론 한일합병 전이며 그곳이 조선은행 출장소가 되었다. 그 뒤에 조선식산은행 출장소로서 8·15 후에 구마산 지점으로 합병되었는데 조선은행 출장소 시절에는 조선인 행원이라고는 칠원인 김성현 단 한 사람뿐이었다. 1911년경에 식산은행(현 제일은행) 후정(後庭) 서북 모서리에 목조 평옥(平屋)의 농공은행 마산지점이 설치되었으며 노폭은 현재대로였으나 신작로로 확장되면서부터 현재 건물로 신축했었다. 그래서 은행이라고는 일본인들의 독점 경영하는 것뿐으로 조선인 상인들은 부득이 이 은행 외에 거래할 곳이 없었다. 1.. 2015. 12.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60. 해방 전의 전기 60. 해방 전의 전화 해방 전(소화 13년, 1938년) 부산 체신국 관할 중 경남 도내의 전화 가설 상황을 보면 부산을 필두로 하여 부·군·읍 소재지 25개처인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화 소유자가 없는 곳이 두 곳이었다. 장승포와 진해읍이 그것이다. 진해는 일본 해군의 군항이며 일본인의 집단지이기도 하지만 조선인 거주촌인 경화동을 포함하여 전화대수 199대 중 경화동 주조주식회사가 전화번호에 나와 있는데 그것이 탁주양조장(조선인 경영?)이라 해도 전화는 개인 소유는 아니엇을 것이며, 읍내에 화월(華月)이란 중국요리점을 빼면 진해읍의 전화는 일본인 일색이었다. 그 당시의 전화에 관한 각종 요금을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격세의 감이 불무(不無)하다. 1. 국내 통화료 통화선 해방 .. 2015. 12. 7.
한국 100명산이야기 18 : 도룡뇽과 지율스님의 천성산 ● 8개월만의 100산 원정 : 지난 2월에 백산에 오른지 8개월만에 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산행일지 쓰는 것도 미루다가 한달에 걸려 쓰게되는군요. 10월 25일 아침 10시반에 메트로시티 정문앞에서 집결하여 천성산을 향했습니다. 정확하게 1시간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두명은 여전히 공사다망한 관계로 4명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 출발 인증샷 : 모처럼 하는 산행이라 대원들끼리 서먹한 표정입니다. - 천성산 홍룡사 일주문 :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때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이라고 합니다. 유서가 깊은 절인것 같습니다. 일주문의 위용은 범어서 못지 않은것 같습니다. - 정자 가홍정 : 절과는 무관한 정자입니다. 근대기(1918년)에 지역 유지가 자기 소유지에 폭포 풍광이 좋아서 .. 2015. 12. 3.
김형윤의 <마산야화> - 59. 마산의 전기약사 59. 마산의 전기약사(電氣略史) ※ 『마산야화』 원문의 ‘한일와사전기주식회사’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를 오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문을 고쳐 ‘일한와사’로 적습니다. 1898년(광무 2) 1월 18일 한성전기주식회사가 미국인 골부란에 의하여 수도 한성에 창설되고 1904년 7월 18일 이를 한미전기주식회사로 개칭, 1908년 7월 30일 일본인 삽택영일(澁澤榮一)에 의하여 일한와전주식회사가 창설되더니 다음해 1909년 6월 24일에 한미전기를 일한와전이 매수하고 이어 명칭을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로 변경하였다. 마산에 전기회사의 지점이 설치된 것은 와전(瓦電)의 지점 개설이 그 효시인데 금일까지의 경과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11년(명치 44) 3월 16일 일.. 2015. 11. 30.
통조림공장에 동원된 마산 학생들,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아래 두 사진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12월 마산의 한 통조림 공장에 동원되었던 남녀학생들 사진입니다. 일제기 강제로 끌려나간 근로보국대는 전국에 무려 762만 명이었으며 그중에서 학생들은 초등학교 고등과(현 중학교)부터가 대상이었습니다. 사진 속 학생들이 궁금합니다. 사진 속의 학생들, 당연히 마산에 소재했던 어느 학교 학생들이겠죠? 사진을 촬영했던 1944년 당시 마산의 초등학교 이상 교육기관은 많지 않았습니다. 남학교로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 전 마산상고)가 있었고 여학교로는 마산공립고등여학교(현 마산여고)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기술학교 및 야학교 등이 있었습니다. 일찍 개교했던 창신학교는 1939년 일제에 의해 이미 폐교된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 2015. 11.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년(원문에는 1905년) 5월 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는 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 2015. 11. 23.
영화 '암살'의 배태지 밀양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천삼백만 국민을 사로잡은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처음 만난 백범 김구에게 던진 말이다.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 가을비가 축축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는 선생과 선생 동지들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밀양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선생의 안내로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비롯해 영남루에 있는 친일매국자 박춘금의 행적,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형장에서 절명한 스무네 살 청춘 최수봉 의사, 조국독립을 위해 서른한 살 젊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초산 김상윤 선생의 유적들을 찾았다. 가는 곳곳마다 밀양의 선열들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했고 밀려오는 경외심만큼 부끄러움도 컸다. 밀양여행의 절정은 약산의 생가 터가 있는 한 작은 동네였다. 항일비밀결사였던 .. 2015. 11. 19.
김형윤의 <마산야화> - 57. 치과의 57. 치과의(齒科醫) 마산에 치과의가 어느 때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으로서 신마산에 총포화약상 겸 광산업을 하던 여창(與倉) 모(某)라는 자와 구마산에 고목(高木) 모(某)라는 자가 있었다. 이들은 정규의 치의(齒醫)가 아니라 일본인 당국자의 묵인 아래 버젓이 한글로 ‘병든 니(齒) 빼고 곤치고 새로 해 방은 병원이요’라는 말목을 문 앞에 세워 놓고 성업(?)을 했지만 사실인즉 그들은 구강위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단순한 입치업자(入齒業者)에 불과해서 전문의가 없었던 때라 충치, 풍치 등의 발취(拔取) 정도도 일반 개업의들에게 의존하곤 했다. 그들 외에도 가짜들이 횡행하던 무렵, 조선인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오랜 수업을 닦고 정규의 절차를 거쳐 온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등장한 사람이 약관의 고상목.. 2015.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