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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정연구원102

마산항지(1926년) - 32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3. 각국거류지의 첫 장날(初市) 명치 35년(1902) 8월 3일은 음역 6월 30일에 해당되니 거류지의 첫 장날임을 각지에 선전하며 시장터를 마산영사관에서 아래로 내려온 현재의 혼마치 네거리 주변 일대로 정했다. 선전 노력의 효과가 났는지 지방시장 상인의 출점이 꽤 많았으며 사방 주위의 손님도 상당수가 모이고 동포들은 첫 시장을 경축하려 상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니 그들도 좋아하고 앞으로 더 성대해질 것 같았다. 한편으로 정기장을 잃게 된 구강(舊江) 민중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전에 반대하고 그것의 회복에 분주하거나 혹은 감리서에 압박을 넣거나 경성 정부에까지 운동하기도 했다. 또한 시장의 이전으로 재산까지 없어진 자가 나오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새 시장을 연 지 20여 회 즉 .. 2023. 1. 16.
마산항지(1926년) - 31 - 건권(乾卷) / 제7장 동포발전사 제7장 동포발전사 저자가 일본인이므로 여기서 '동포'란 마산 거주 일본인을 말한다. 1, 일본인회의 조직 명치 32년(1899) 5월 1일의 개항 당시 우리 일본 동포로서 마산포에 거류한 자는 야마모토 고조(山本好藏), 스미다 마사키치(隅田政吉), 하마다 린조(濱田林藏)와 그 외 2~3명에 불과했다. 미곡상인 나가사키(長崎) 현 사족 출신의 마츠바라 하야조(松原早藏) 씨가 본거를 부산의 친형 마츠바라 도모조(松原友藏) 씨 집에 두면서 창원읍내에 임시로 살며 가을에 미곡 매출로 왕래하는 일 외에는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원 2~3명과 경찰관 2명이 있을 뿐이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제1회 각국거류지 경매 이래 마산의 좋은 입지와 산수의 풍광명미함이 강지에 선전되어 이주자도 역시 점점 늘어나 동 33년(190.. 2023. 1. 9.
마산항지(1926년) - 19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제5장 근고사(近古史) 4. 마산의 이름 유래 히데요시 전쟁(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곳곳에 역병이 유행하여 창원성(昌原城)이 있는 오산진(午山津)에서는 날마다 송장이 산더미를 이루는 참상을 보였다. 오십인총, 삼십인총, 이십인총 등이 도처에 나타나 살아남은 노인들이 상의해 풍수사(風水師)를 불러 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했다. 신에 빙의한 풍수사가 이르기를, 오산의 오(午) 자는 오래 산다는 길한 자인데 저주받은 이 땅에서 그 글자를 씀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샀느니 라고 했다. 상의 끝에 오(午) 자는 말 마(馬) 자와 동의어라 오산을 마산으로 고치기로 하니, 이것이 오늘날 마산부 이름의 유래(당시 민간에 떠돌던 하나의 속설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2022. 10. 17.
마산항지(1926년) - 18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제5장 근고사(近古史) 3. 사추마군(蕯軍, 융군)의 호랑이 잡이 기록(搏虎錄) 가고시마(鹿兒島)에서 출판된 『시즈노오다마키』(倭文麻環-아래 그림)란 책에서 창원을 차왕(茶碗)이라 기재한 박호록(搏虎錄)의 기사가 있는데 창원의 발음이 잘못 전해진 것 같다. 호랑이를 잡은 곳은 현재의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에서 회성리에 이르는 지역의 산악으로 그 중심은 봉화대(烽火臺) 산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그 전문의 초록을 실으니 참고자료로 해 주기 바란다. 분로쿠(文祿) 원년(1592) 임진년 히데요시 정한의 역(役)이 일어났을 때 사츠마(蕯摩)의 성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아들 히사야스(久保)와 더불어 참전하여 조선해의 거제도 북쪽 곶에 축성하여 수궁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거제도는 일면 가라섬(韓島.. 2022. 10. 10.
마산항지(1926년) - 17 - 건권(乾卷) / 제5장 근고사(近古史) 제5장 근고사(近古史) 1. 이씨조선의 흥기 고려 말 함경도 함흥 사람, 이, 즉위 후 단(旦)을 자(字)로 스는 성계(成桂ㅡ 아래 사진) 병마사(兵馬使)가 왜구를 전라도 운봉현(雲奉縣) 병산(屛山)에서 물리치고 점점 세력을 키우더니 스스로 삼군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급기야는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반도 천하의 통일을 이룩해 왕위에 올랐다. 이 인물이 이찌조선(李氏朝鮮)의 시조왕(始祖王)으로 즉위하니 그 해를 개국기원 원년으로 정한 그때는 일본 99대 고가메야마(後龜山) 천황 즉위 9년 임신(壬申, 1392)년 7월이었다. 이 왕실이 그 후 약 5백 년간 계속하여 마지막 무렵 대한(大韓)으로 개조하여 왕위 대신 황체라 칭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대한민국은 그 모든 것을 명치 대황제에게 바치고 나라를 일본 .. 2022. 10. 3.
마산항지(1926년) - 14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제4장 중고사(中古史) 3. 제2차 정동전쟁(征東役) 신사(辛巳, 1281) 충렬왕 즉위 7년, 곧 일본 91대 고우다(後宇多) 천황 고안(弘安) 4년 정월 정동원수부(征東元帥府)는 합포로 이전하여 신첨군(新簽軍, 새로 징발해 평성한 군대. 원나라는 주로 정복지역의 이민족으로 이 군대를 편성해 참전시켰다) 1만5천은 함안의 파수고개(오기 - 巴嶺, 고려사의 기록에는 巴嶺이 아니라 절령(岊嶺)이다. 절령은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험한 고개로 고려 원종 11년(1270)부터 충렬왕 16년(1290)까지 원 나라와의 경계였다. 충렬왕 7년(1281) 1월 28일 을축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동행성에서 첩문을 보내어 신첨군 1만5천 명의 식량 및 대군이 절령에서 합포에 이르기까지 말에게 먹일 자료를.. 2022. 9. 12.
마산항지(1926년) - 13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제4장 중고사(中古史) 2. 정동군(征東軍)의 출발지 이에 앞서 원의 세소제는 이미 남송(南宋)의 왕실을 움직여 무위(武威)는 사방으로 드날렸으나 오직 일본열도 제국만은 의연하게 동행 우뚝 서서 대치하는 모습은 마치 원나라가 일어난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이에 따라 수차례 선유사(宣諭使)를 보내어 조공을 재촉했던 것이다. 당시의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의 집정직에 있던 호조사가노미노카미 도키무네(北條相模守時宗)는 강인하고 과단력 있는 성격의 인물이라 원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그 서한의 존대 무례함을 힐책해서 그 사신을 방축 시키거나 참살까지 해서 답서를 주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화를 내며 일본을 정복하기로 결정하여 새로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세워 원나라의 종왕(宗王)을 그곳의 좌승상.. 2022. 9. 5.
마산항지(1926년) - 12 - 건권(乾卷) / 제4장 중고사(中古史) 제4장 중고사(中古史) 1. 내우외환 마산의 중고시대는 고려왕조 시대에 있고 마산 지방이 아직 고려의 판도에 들어가기 전 즉 경진(庚辰) 고려 건국 3년(920), 겨울 10월, 백제의 재흥을 꾀하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의 합천 옛 땅인 다라(太良), 현 마산과 창원의 옛 당인 구시(仇史), 현 김해군 지방인 진례 및 기타 여러 군을 탈취했다. 병신(丙申, 936) 고려 건국 19년 가울 9월, 고려 시조인 왕건이 통일을 이루고 경자(庚子, 940) 고려 건국 23년 봄 여러 군현에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때 합포현을 세우고 19세기 명종 7년, 정유(丁酉,1177)에 환주산의 합포현성을 크게 확장하여 동남도병마절도사를 병치하였다. 24세 원종 왕 이전부터 왜구 즉 일본해적은 반도의 남해에 출몰해 .. 2022. 8. 29.
마산항지(1926년) - 9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4. 융희 황제의 행차 명치 42년(1909) 즉 대한 융희 2년(3년의 誤植) 1월 10일, 부왕인 광무(光武) 황제의 선양을 받으신 한황 이척(李坧)폐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남쪽 순행(순종황제는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순행했는데 이를 남순행(南巡幸),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 등지를 순행했는데 이를 서북순행(西北巡幸)이라 했다) 길에 올라 부산에서 철도로 마산으로 오시고 마산 이사청을 행재소(行在所)로 삼으셨다. 이에 앞서 어가(御駕)가 남순 하신다는 소식에 관계당국은 밤낮 가리지 않고 봉영(奉迎) 준비에 분주하고 청록의 물방울이 그려진 큰 봉영문(奉迎門)이 마산역전, 교마치2정목, 반룡교 부근(현 교바시, 京橋), 동 1.. 2022. 8. 8.
마산항지(1926년) - 7 - 건권(乾卷) /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제2장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1. 고려 충렬왕의 행사(行幸) 마산은 원래 합포로 불려 왔는데 이 명칭은 현재의 마산 행정구에 한정되지 않고 마산만 연안 전부에 대한 호칭이었던 것 같다. 그 관할은 현재의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에 그 중심을 두고 진성(鎭城)은 현 마산부 자산동에 있는 환주산(還珠山, 현재의 추산 騶山)에 그 폐허(會原縣城址- 아래 사진)가 남아 있다. 몽고의 호족 출신으로 원나라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 황제 홀필열(忽必㤠)은, 징기스칸의 손자로 그 위망이 높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그 조공을 받던 터. 고려 25세 충렬왕(忠烈王)을 부마(駙馬)로 삼고 반도를 그 영토에 넣었다. 이미 남송을 통하여 일본의 동향을 알아보도록 했는데, 일본은 파견된 사신을 받지 않거나 죽이기까지 하면서 원 왕.. 2022. 7. 25.
마산항지(1926년) - 6 - 건권(乾卷) / 제1장 마산항의 대관 제1장 마산항의 대관 3. 지질(地味)과 수질 마산 부근 일대의 땅은 대체로 제3기층에 속하며 산이나 계곡에는 화강암 혹은 그 결정편암이 노출되어 돋아난 데가 많다. 해변의 평야는 대개 충적층이므로 지질은 비옥하다. 그러기에 해변 제방 안의 소금기 많은 논밭 이외에는 쌀과 보리와의 이모작, 혹은 보리와 소채류 교대작의 수확이 있다. 산에는 큰 나무가 없어서 울창하지는 않지만 묘역이나 기타 특별히 보호의 손길이 미치는 데는 소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느슨한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관공사유지(官公私有地)로서 남벌금지구역 혹은 총독부 임정(林政) 방침을 따르는 조림지 등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땅을 덮게 된 몇 년 후에는 마산 육군 군용림 등 일부에서는 송이버섯이 생육하기도 한다. 이십여 년 .. 2022. 7. 18.
마산항지(1926년) - 5 - 건권(乾卷) / 제1장 마산항의 대관 제1 마산항의 대관 2. 날씨(風信)와 기온 마산에는 아직 측후소가 설치되지 않아 겨우 부청이나 기타 한두 개의 불완전한 사설 기관이 있을 뿐이다. 여름에는 남풍이 불며 때로는 유쿠(琉球, 오키나와) 방면에서 일어나는 폭풍우, 곧 태풍이 내습하여 나무를 꺾어버리고 집을 날려 버리는 참혹한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낙동강 연안의 수리조합이나 농장 등의 경작지는 물이 범람하여 누런 호수가 되며 수확이 전무한 흉년을 호소하기도 하며 교통기관의 운전이 방해되기도 한다. 그래도 북에는 산이 있고 남으로 경사져 있는 마산에서는 과거에 이와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해지에 식량이나 연료, 피난용구, 배, 예방약품 등을 공급, 구제하는 일이 예사다. 혹서(酷暑)는 7월 중순부터 8월 하순까지이며 최고 화.. 2022. 7. 11.
마산항지(1926년) - 4 - 건권(乾卷) / 제1장 마산항의 대관 마산항지 건권(乾卷) 오릉(午陵) 하쿠엔보(白猿坊) 스와 시로(諏方史郞) 제1 마산항의 대관 1. 위치 및 지세 우리 마산항은 조선반도의 동남쪽, 경상남도의 중부에 있으며 마산부의 관치(官治)에 속하며 창원군 관할의 복부(腹部)에 포함된다. 그 위치는 동경 128도 33분, 북위 35도 11분의 교차점을 낀다. 동서 28정(町, 거리의 단위. 1정은 1간(間)의 60배로 약 109미터이다) 30간(間). 남복 1리 14정 사이에 펼쳐져 육지 면적은 1방리(方里, 가로세로 1리(里)가 되는 면적. 약 15㎢이다)의 63퍼센트에 불과하다. 전면은 바다로 마산만에 임하며 만 내 거의 중앙에 주위 500간도 안 되는 저도(猪島), 일명 월영도(月影島)가 누워 있고, 그 동쪽 끝을 경계선으로 한 약 2해리를 마산.. 2022. 7. 4.
마산항지(1926년) - 3 - 목차 / 건권(乾卷), 곤권(坤卷) 현세사(現勢史) 목차 마산항지 건권(乾卷) 제1 마산항의 대관 1. 위치 및 지세 2. 날씨와 기온 3. 지질과 수질 제2 영광에 찬 마산의 산과 바다 1. 고려 충렬왕의 행차 2. 고노에(近衛) 귀족원 의장의 내유 3. 동궁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 4. 융희황제의 행차 5. 이토 통감의 애석(愛惜) 제3 상고사(上古史) 1. 고시가라(古志加良) 이름의 연유 2. 일본 황실의 대한책(對韓策) 3. 최치원의 내유(來遊) 제4 중고사(中古史) 1. 내우외환 2. 정동군(征東軍)의 출발지 3. 제2차 전동전쟁(征東役) 4. 스와오카미(諏方大神)의 기서(奇瑞) 5. 전쟁 후의 지방 사정 6. 왜구의 침해 제5 근고사(近古史) 1. 이씨 조선의 흥기 2. 마산성터의 유래 3. 사츠마군(蕯軍)의 호랑이 잡이 기록(摶虎錄) 4. .. 2022. 6. 27.
마산항지(1926년) - 2 - 추천사, 저자 머리말 스와 시로(諏方史郞) 옹의 저술 『마산항지』에 붙여 도오산(宕山) 소시 힌(莊子 斌) 煥發史才斑馬豪(환발사재반마호) 옹의 사재가 얼룩말의 빛과 같이 드러남이여 操觚幾歲肺肝勞(조고기세폐간노) 문필 작업하는 세월동안 허파와 같이 성했을까 謝君彰考闡幽筆(사군창고천유필) 선친의 필치를 펼치어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爲我馬山吐氣高(위아마산토기고) 우리 마산을 위해 기운을 크게 토하셨네 父子文名並見豪(부자문명병견호) 부자 함께 문명을 호쾌히 보이시도다 料知昔日切嗟勞(료지석일절차노) 일찍이 절차탁마의 노력 있었음을 알겠도다 一家衣鉢相傳在(일가의발상전재) 가문의 전통이 전승되고 있음이여 筆底波瀾萬丈高(필저파란만장고) 붓 아래 치는 파도 만장같이 높도다 스와 옹의 시문(詩文)의 원천은 부친 고슈(翁洲) 선생의 은택인 바, .. 2022. 6. 20.
마산항지(1926년) - 1 - 발간사, 해제 일제강점기 마산 관련 사료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문헌인 스와 시로(諏方史郞)의 가 2021년 9월 번역돼 나왔다.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의 '지역사발굴연구 교양총서'의 하나로 지난 2월에 발행된 '마산번창기'에 이어 두 번째이다. 1908년에 나온 마산번창기와 같은 저자의 저술로 1926년에 발행되었다. 이 책은 크게 건, 곤(乾, 坤) 두 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乾권에서는 마산항의 위치, 지세, 기상 등을 개관한 후 마산의 상고사, 중고사, 근고사, 개항사, 일본인 이주사 등을 서술하고, 현세사인 坤권에서는 1920년 중반 당시 마산의 행정, 경제, 교육, 교통, 통신, 문화, 풍속, 현안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은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여러 연구에 자주.. 2022. 6. 19.
마산번창기(1908년) - 28(마지막)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7 (20) 마산시(馬山是) 표제의 시(是)란 무엇인가. 시란 도리에 맞는 것, 곧 일반 사람들이 인정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방침을 말한다. 마산은 미두(米豆)가 풍요하게 생산되는 곳이니 쌀과 콩을 가지고 마산의 시(是)로 삼는 것이 좋다. 연해의 고기잡이의 이익(漁利)도 풍부하니 이것을 가지고 마산의 시로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항만은 태평양 안의 제3위의 최량 항만이긴 하나 군항이 있어서 상업 대항구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인을 상대로 한 장사만으론 마산시(馬山是)로 삼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는 양조업(釀造業)을 마산의 시로 권하고 싶다. 술, 간장, 된장을 양조하는 양조지가 되어 한국의 12도에 판매토록 함으로써 미두와 어업과 합쳐서 마산시로 하고 싶.. 2022. 3. 14.
마산번창기(1908년) - 27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6 (16) 마산야학회 마산 본포의 입구에 그 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건물은 한인, 일인의 공유물이며 전에 마산공립학교이었던 한동(韓童) 교수소와 가키하라 지로(柿原次郞) 씨가 지도하는 일어학교의 합동 교습실이었던 곳이다. 지금도 한국 학동(學童)의 야간교습소라 하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릴 때는 많지가 않은 것 같다. (17) 마산아마추어 사진연구회 이것은 신시에 사는 부고츠(武骨)란 이름을 쓰는 본 책의 저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인데, 사진 도락(道樂)같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없으니 회원은 많지 않으나 모두 열심이다. 그 사무소는 신시에서는 이와모토(岩本) 사진관, 마산포에서는 진해헌(鎭海軒) 사진소의 두 군데이며 회원 사진화(寫眞畵)의 현상, 수정 .. 2022. 3. 7.
마산번창기(1908년) - 26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5 (14) 요리점과 예기, 작부 마산이사청 관내에 임대방(貸坐敷, 대좌부)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게는 없고 다 요리점이라고 한다. 요리점은 임대방의 대명사이다. 이 요리점은 공회당이기도 하고 교성을 자아내는 따뜻한 방이 되기도 한다. 작부는 예기의 대명사이며 예기란 요금을 정하고 손님과 한 이불을 쓰는 그런 예기는 공창이지만 불법 매춘부는 아니다. 예기는 모두 감찰(鑑札)을 두 장 가지고 있고 작부를 겸하고 있으며 작부와 다른 점은 같이 잘 때의 요금이 조금 비싸다는 것이다. 작부는 샤미센(三味線, 삼미선)을 치지 않지만 예기는 그 실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샤미센도 치고 북도 치고 춤도 춘다. 이부자리에서의 동작은 예기든 작부든 매 한 가지다. 이 두 업종은 원적지 .. 2022. 2. 28.
마산번창기(1908년) - 25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4 (9) 바둑과 일본 장기 이것들은 앞서 나온 기다유부시(義太夫節) 보다 대유행인데 바둑에 관해선 대충 아래와 같은 것이다. 다나카 손(田中遜) 씨가 마산에서 바둑을 처음 두기 시작한 사람이며 방원사(方圓社, 1879년 발족된 일본바둑 조직) 급수로 8, 9급 정도나 될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노지마 타이조(野島種造), 기무라 구메타로(木村久米太郞) 씨가 될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 잘 두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으로 오가타 치요사부로(緖方千代三郞), 야마모토 구니츠구(山本國次), 후지사키 도모히데(藤崎供秀) 씨 등이다. 그 외에도 두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유키모토 야타로(行本彌太郞) 씨, 이이즈카 추타로(飯塚忠太郞) 씨, 모모키 게이이치(百木惠一) 씨.. 2022. 2. 21.
마산번창기(1908년) - 24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3 (8) 덴구카이(天狗會, 공연에 취미가 많은 아마추어 개그맨들의 모임을 뜻함 /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일본의 전통 놀이) 덴구카이(天狗會)란 소위 풋내기 기다유(義太夫, 원래 정류리(淨瑠璃) 인형극에 수반되는 창을 뜻함) 애호가 모임인 덴구렌(天狗連)을 가리킨다. 이 창(唱)은 마산포와 신시 관계없이 대유행하고 있다. 특히 신시의 그 모임은 1908년 6월 9일, 10일 양 일 밤, 야나기마치(柳町)에 있는 극장 마루니시좌(丸西座)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반주 샤미센(三味線)은 도요자와 난자부로(豊澤團三郞)가 치며 박수갈채를 받은 당시의 출연자와 그 연기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 -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교토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1001개의 천수관음상으로 .. 2022. 2. 14.
마산번창기(1908년) - 23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2 (2) 마산경제협회(馬山經濟協會) 1907년(명치40년) 봄 즈음에 마산 유지자들이 구두 약속으로 성립된 조직이며 별도 규칙, 규약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일정한 회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마산포와 신시에서 격월로 모임을 가져왔으나 중도에 뜸해지다가 1908년 봄 다시 활발해지고 매월 한 번의 모임이 신시에서만 개최되고 있다. 매회 마다 전 간사는 당일 이후의 간사 2명을 지정하며 지정 받은 자는 어떠한 이유라도 이를 사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의리와 인정이 있는 모임이라 한 층 재미가 있어 보인다. 회원에는 관리, 신문기자, 은행가, 종교인, 야채 집 주인도, 의사도 있어 아주 다양한 모임이다. 그리고 마산의 이해에 관련되는 사안은 아무나 문제를 제출할 .. 2022. 2. 7.
마산번창기(1908) - 22 -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제10장 마산잡록잡황(馬山雜錄雜況) - 1 (1) 마산상업회의소 1908년 3월 30일, 다가까손(田中遜) 씨 외 29명이 발기 인가를 받고 5월 23일 설립 인가를 얻어 5월 30일 의원 선거에 의해 6월 1일 임원의 선출이 끝났으므로 비로소 그 성립을 고(告)하게 된 것이다. 이 설립에 관해서는 불필요론자도 시기상조론자도 있는데 그 주장하는 바는 마산 경제계가 부진한 데도 각자의 부담을 증대시키는 것은 마산 발전의 앞길을 어둡게 한다는 일치된 소신 때문이다. 그래도 니시카와 다로이치(西川太郞) 씨의 의지는 확고하여 이곳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으며 시기카와 씨의 주선으로 서기장(書記長)까지 마산에 들어와 있으니 반드시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의원이 되겠다는 인사들 중에는 열심히 한 운동으로 마.. 2022. 1. 31.
마산번창기(1908) - 21 - 제9장 경제사정 제9장 경제 사정 - 4 ■ 마산의 상황(商況) 한 측면은 대개 다음과 같다. □ 잠건(蚕巾, 실크) - 영국령 홍콩제로 수요기는 매년 8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의 8개월 동안이며 한 달 평균 25,000필의 거래가 있는 모양이다. 한 필(匹) 대금이 6원이라면 한 달 15만 원, 8개월이면 120만 원이 되며 이것이 수입품목의 으뜸가는 상품이다. 용도는 한인의 흰옷(白衣)에 조제(調製)된다고 한다. □ 방적사(紡績絲) - 한 가마 20 다발 150 근으로 매월 30가마 씩 팔리는데 일 년에 적산하면 3,600 가마에 달한다. □ 백목면(白木綿) - 이것도 한인의 흰옷에 쓰이며 일 년에 26,000 필의 판매량이 있다. 한 필당 1월 70전으로 평균으로 매상고는 44,200원으로 예상한다. □ 마포(麻布.. 2022. 1. 17.
마산번창기(1908) - 20 - 제9장 경제사정 제9장 경제 사정 - 3 ■ 토지매수상의 주의 토지매매에 있어서는 거류지에는 지계(地契)라는 것이 있어 일본과 같이 등기에 관한 법이 있는데 기타 지역에서는 한인에게서 토지를 사들일 때는 한 장의 문서만 그 증거가 된다. 이때 교활한 한인이 문서를 위조하고 장소를 거짓으로 하거나 판매 금액을 속이는 등 상식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이 들통 나서 힐책하게 되면 도망을 가기도 한다. 이를 한인과 직접 매매 계약을 하거나 한인의 주선으로 그 사기의 술책에 넘어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어 세상 사람들의 실소를 부른 이가 적지 않다. 얼마 되지 않는 수수료를 아낀다고 한인을 믿고 싸구려 땅을 비싸게 사느니보다 확실한 일인 주선인(周旋人)에 부탁하는 것이 득책(得策)일 것이다. 이런 믿.. 2022. 1. 10.
마산번창기(1908) - 19 - 제9장 경제사정 제9장 경제 사정 - 2 ■ 수입품 나가사키(長崎),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또는 부산 등에서 수입하고 기타 외국에서 직접 수입하는 것은 적다. 주된 품목은 견면마포(絹綿麻布, 청국제 포함), 일용잡화, 관제담배, 박래잡화(舶來雜貨), 일본 청주, 맥주 및 기타 주류, 한인용 솥 종류 및 기타 주철, 광철류, 밀가루, 설탕, 석유, 성냥, 기와, 대나무, 목탄, 목재 등이며 그 총량은 180만 원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시황란(市況欄)에서 밝히겠다. 해산물 및 그 수송기관은 대개 아래와 같다. □ 마산수산주식회사 이 회사는 신시의 하마마치(濱町, 창포동) 3정목에 있으며 1905년 발기회를 열어 4월부터 어류 경매 영업을 시작하여 1906년 6월 1일 설립인가를 거쳐 법.. 2022. 1. 3.
마산번창기(1908) - 18 - 제9장 경제사정 제9장 경제사정 - 1 마산에서 금융기관으로 확립된 데는 두 군데밖에 없으며 제일은행 마산출장소(아래 사진)와 경상농공은행 마산출장소가 그것이다. 전자는 일본이 설립에 관여한 상업기관이며 후자는 한국이 세운 농공업기관이다. 이 외에도 이자가 비싸서 가혹하다는 평을 받는 일시적으로 편리한 전당포도 있다. 또한 한인을 상대로 작은 자본으로 막대한 이익을 악착같이 남기면서 부자가 된 고리대업자도 있다. 그들도 일본을 위한 생산증식의 자본을 공급하는 하나의 기관이기도 하니 동정을 해 줘야겠다. 원래 한국 연안은 일본 경제계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금융에 변동을 초래하게 되어 있으며 본 항구도 그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 일본 농업에 흉작의 기미가 있다면 본 지방의 중요한 산물인 쌀, 보리, 대두(大豆), 소.. 2021. 12. 27.
마산번창기(1908) - 17 - 제8장 호구(戶口) 제8장 호구(戶口) 본 항구의 일본인은 개항 당시 모두가 한국인 집을 빌려서 살기 시작했으며 신시(新市)에 열 몇 명의 러시아인과 한두 명의 영국, 프랑스인이 거류할 뿐이었다. 다음 해 신시에 일본인 가옥이 두세 채 나오게 되고 광무 7년 즉 1903년에 이르러 그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신시는 여전히 러시아가 독점하다시피 하여 러시아 군함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기생이 러시아 수병에 의해 욕을 당한 사건도 터져 영사관의 유시(諭示)는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다 신시에 이사해 오는 것을 꺼리며 청국(淸國) 사람과 함께 마산포에서 같이 살며 서로 상업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찰관이란 오직 영사관을 지킨다는 직무를 수행할 뿐 일반인들에게 대해서는 아주 오만불손하며 뇌물이나 주지 않으면 그들.. 2021. 12. 13.
마산번창기(1908) - 16 - 제7장 교통 제7장 교통 □ 우편전신, 전화 이들 사무는 모두 마산우편국에서 취급하고 일본인, 청국인, 한국인은 물론 구미인의 서신, 전보도 다 다루고 있다. 집화와 배달은 매일 수차례 행해지며 아주 편리하다. 특히 마산포에도 히로시 세이조(弘淸三) 씨를 소장으로 하는 우편소가 있어 서신과 전보를 취급하고 있다. 부근 각지의 서신과 전보를 처리하고 마산국과 연락을 취하는 곳으로 진해우편소, 통영우편소, 진주우편국과 청도 연선(沿線)의 각 역(驛)이 있어 공중전보(公衆電報)를 취급하고 있다. □ 철도 마산철도는 원래 일본 육군의 군사용으로 1904년 8월, 러일전쟁 교전 중에 경부선의 삼랑진에서 분기(分岐)시켜 속성 공사로 부설되어 다음 해 6월에 개통했다. 평화가 돌아와 다음 해 1905년 10월부터 일반 승객의 편.. 2021. 12. 6.
마산번창기(1908) - 15 - 제6장 신도 및 종교 제6장 신도 및 종교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런 시설도 없지만 멀리 고향을 떠나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숭배하여 앞날의 안전을 기원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건너와 오늘날 평온하게 살 수 있음은 신명(神明)의 가호(加護) 덕분이라 감사하지 않는 자 또한 없으리라. 날마다 신에게 감사하고 우국지심을 굳건히 하는 데는 간접적으로라기보다 직접적으로 참배를 통해서 그 기원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무사도(武士道)의 장려에 도움이 되고 일본 정신을 양성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시 제일의 경승지(景勝地) 속칭 호시오카(星岡)는 당국자들 사이에 이미 공원지가 될 것으로 예정되어 맨 먼저 이세신궁의 그 혼을 나누어.. 2021. 11. 29.